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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모르는 강철 골퍼, 최윤수 프로
서울 능동 출신인 최윤수 프로는 17세 때 군자리 코스 캐디로 취업하며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뉴서울 골프장이 오픈하면서 이직했다. 스무 살 때는 을지 연습장에서 골프를 이어갔다. 그에게 연습장은 골프를 배운 장소였다기보다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피난처였다. 오후 5시부터 아침 8시까지 연습장을 지켰고, 틈이 있을 때만 연습할 수 있었다.
글 박진권 기자 자료 한국프로골프40년사
프로를 향한 마지막 도전
프로 테스트는 서른 살 때인 1977년에 합격했다. 1970년에 입대 영장을 받고 절박한 심정으로 프로 테스트에 응시했지만, 1타 차이로 탈락했다. 제대 후에는 프로 테스트가 없었다. 한국에는 선수도 없었고, 협회 재정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신세계 연습장에 취직했고, 월급을 받으면서 안정된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1977년에 프로에 데뷔할 수 있었다. 이때 합격하지 못했다면, 프로 골퍼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듬해 협회가 프로 테스트 응시 연령을 서른 살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프로 데뷔 한 달 뒤에 열린 제1회 쾌남 오픈에서 5위를 차지하면서 두각을 보였다. 그해 자격 조건이 되지 않았지만, 아시아 서키트에 출전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됐다. 아시아 서키트에서 랭킹 5위 이내의 선수가 출전하지만, 유망주라는 혜택을 받으면서 많은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물론 모든 대회에서 예선 탈락을 했으나, 그에게는 충분한 경험이었다.
찬란한 프로부터 화려한 시니어까지
최윤수 프로에게 1979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월드컵은 그에게 잊지 못할 대회다. 우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수 생활에 큰 동기부여가 됐기 때문이다. 프로 데뷔한 뒤 2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내 랭킹 1, 2위를 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1978년에 랭킹 2위를 차지했고, 다음 해 조태호 프로와 월드컵에 출전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그의 우승 행진은 이어졌다. 1980년에 부산 오픈에서, 첫 승을 기점으로 1982년에는 내셔널 타이틀인 한국오픈, 이어서 수원오픈과 1987, 1988, 1990년에는 한국 프로골프선수권에서도 우승했다. 재밌는 사실은 위 대회에서 우승할 때 모두 한국 간판스타 최상호를 누르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후 1990년 43세의 나이로 한국 프로골프선수권 우승을 마지막으로 승수를 쌓지 못했다. 그렇게 시니어 투어로 발길을 돌렸다. 그럼에도 정규 투어에 출전하는 노익장을 과시했고, 55세에는 포카리스웨트 오픈에서 2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정규 투어에서도 먹히는 그는 시니어투어에서는 절대 강자다. 1998년 한국 시니어 오픈, 한국 시니어 프로골프선수권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총 29승을 기록하게 된다. 특히 2003년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안 시니어 마스터스에서 해외 시니어 무대 첫 승을 올렸다. 2004년에는 대만에서 열린 TCC 시니어 오픈, 2005년에는 말레이시아 시니어 오픈의 정상을 차지한다. 그는 2002년에는 시즌 5승을 기록해 개인 연간 최다승을 기록했다.
2006년 경인일보 배 아시아 시니어 오픈에서는 최상호와 연장 4번째 홀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지만, 일몰로 인해 공동 우승자가 되기도 했다. 2008년에도 총 7개 대회에 출전했고 한국 시니어 오픈에서 5위를 차지하면서 건재를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