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정길종 기자 |대한민국 스포츠에는 한 종목의 경쟁력을 높인 선수가 있고, 종목의 역사를 바꾼 선수가 있다.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e스포츠의 페이커(이상혁)는 후자에 속한다. 이들은 단순히 세계 정상에 오른 챔피언을 넘어 종목의 대중성과 산업의 지형까지 바꿔놓은 상징적인 존재다.
김연아가 등장하기 전 피겨스케이팅은 국내에서 일부 마니아층이 즐기는 종목에 가까웠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선수권 우승, 압도적인 경기력은 국민적 관심을 끌어냈고 기업 투자와 유소년 선수 육성으로 이어졌다.
김연아는 한국 피겨의 수준을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한국 피겨의 역사를 새로 쓴 선수였다.
하지만 은퇴 이후 한국 피겨는 새로운 과제를 마주했다. '김연아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김연아가 지녔던 상징성과 대중성을 온전히 이어받은 선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누군가의 부족함이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얼마나 희소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지금 한국 e스포츠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2013년 첫 수상한 페이커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리그 오브 레전드 최고의 선수이자 한국 e스포츠의 얼굴로 활약했다.
세계 정상의 실력은 물론 프로게이머의 품격과 책임감을 보여주며 e스포츠를 하나의 스포츠이자 문화 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외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로 인식될 만큼 그의 영향력은 경기장을 넘어선다.
페이커의 진정한 가치는 우승 횟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시간 정상을 유지한 꾸준함과 자기관리, 팬과 경쟁자를 존중하는 태도는 e스포츠가 지향해야 할 기준이 됐다. 그래서 페이커는 기록 이상의 상징으로 남는다.
문제는 그 이후다. 현재 LCK에는 세계 정상급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뛰어난 선수와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다른 의미다. 누군가를 '제2의 페이커'로 만들겠다는 접근은 오히려 부담만 키울 수 있다.
한국 피겨가 김연아 이후 고민했던 것은 새로운 스타를 억지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스타가 계속 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선수 육성 시스템을 강화하고 저변을 넓히며 종목 자체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
한국 e스포츠도 이제는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유소년 육성 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2군 리그와 아카데미 시스템을 활성화하며, 선수들의 장기적인 커리어를 지원해야 한다.
은퇴 선수들이 지도자와 해설자,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글로벌 팬덤과 콘텐츠를 확대하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결국 산업을 움직이는 힘은 한 명의 스타가 아니라 건강한 생태계다. 스타는 시대를 만들지만, 시스템은 다음 시대를 준비한다.
김연아는 한국 피겨를 세계에 알렸고, 페이커는 한국 e스포츠를 세계 표준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또 다른 천재 한 명이 아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자라고, 새로운 스타가 자연스럽게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이제 한국 e스포츠가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페이커를 대신할 선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페이커 이후에도 세계 최고를 유지할 시스템은 무엇인가.' 그 답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e스포츠가 지금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미래 전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