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강매화 기자 |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한국과 일본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을 다시 꺼내 들었다. 출발점으로는 에너지를 지목했다. 원유와 가스의 공동 구매·비축에서 시작해 장기적으로 양국의 전력망과 가스관까지 연결하자는 제안이다.
미·중 갈등과 보호무역 확산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블록화하는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이 각각의 시장으로 남아 경쟁하기보다 산업과 에너지 인프라를 연결해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최 회장의 판단이다. 양국 경제를 합치면 약 6조달러 규모의 세계 4위권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내놨다.
8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공개한 인터뷰에서 최 회장은 한일 경제공동체 구축을 위해 “우선 서둘러야 할 것은 에너지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양국이 에너지 구매부터 비축, 사용까지 공동으로 설계한다면 조달 비용을 낮출 여지가 상당하다고 봤다. 비용을 3~5%만 절감해도 양국 경제 전체에 미치는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에너지부터 묶자…“장기적으로 송전망·가스관 연결”
한국과 일본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특히 중동산 원유 공급에 민감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정학적 충돌로 중동발 에너지 공급 불안이 커질 때마다 두 나라 모두 국제유가와 운송비 상승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 회장이 에너지를 한일 경제협력의 첫 단추로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협력 범위는 단순한 원유 공동구매에 그치지 않는다. 정유·석유화학부터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수소 등으로 공동 사업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구상이다. 에너지 비축시설과 공급망을 함께 활용하면 중복 투자 비용을 줄이고 공급망 충격에도 공동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한발 더 나아가 최 회장은 “장기적으로는 양국에 송전망과 가스관을 연결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에너지 거래를 넘어 한국과 일본의 에너지 인프라 자체를 연결하는 그림이다.
◇각자 싸우기엔 시장 작다…‘6조달러 경제권’ 제안
최 회장의 구상에는 글로벌 경제질서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장기화하고 각국이 자국 산업 보호에 나서면서 기업 경쟁력 못지않게 ‘시장 규모’가 중요해졌다는 판단이다. 미국·중국·유럽연합(EU)처럼 거대한 내수시장과 공급망을 가진 경제권에 한국과 일본이 개별 국가 단위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저출생·고령화라는 구조적 문제도 두 나라가 닮았다. 인구 감소로 내수시장이 축소되고 복지·의료·에너지 등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시장과 산업 인프라를 공유하면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규모를 합치면 약 6조달러에 이른다. 최 회장이 ‘세계 4위 경제권’ 가능성을 언급하는 배경이다.
◇“반도체는 경쟁 아닌 보완”…韓 제조와 日 소부장 결합
산업 협력의 핵심 축으로는 반도체와 AI가 꼽혔다.
최 회장은 한일 반도체 산업을 단순한 경쟁 관계로 보는 시각과 거리를 뒀다. 한국이 메모리 등 반도체 제조에 강점을 갖고 있고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두 나라가 결합하면 공급망 전체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협력하지 않는 것보다 협력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 크다”며 “한일은 반도체에서 경쟁 관계라기보다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고 강조했다.
SK그룹도 일본 기업과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
최 회장은 일본 최대 통신기업 NTT와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을 AI·반도체 분야의 주요 협력 파트너로 거론했다. SK하이닉스가 투자한 일본 낸드플래시 업체 키옥시아와의 협력 확대 가능성도 제시해왔다.
그는 “SK그룹도 일본 투자를 늘렸고 6~7년 전부터 일본 경제단체를 찾아가 회의와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며 AI와 헬스케어 등 첨단산업에서 협력 기회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CPTPP까지 연결…‘한일 경제공동체’ 제도화 구상
최 회장은 민간 기업 간 협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제도적 경제통합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들었다. 한국이 CPTPP에 가입하면 일본을 비롯한 회원국과 상품·서비스·투자와 공급망 분야의 경제적 연결을 한층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한국도 가입해야 한다”며 CPTPP를 한일 경제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으로 평가했다.
결국 최 회장이 그리는 한일 경제공동체는 자유무역 확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에너지를 함께 사고 비축하고, 반도체 공급망을 결합하며, 장기적으로 전력망과 가스관까지 연결하는 ‘산업·인프라 공동체’에 가깝다.
과거사와 외교 현안으로 한일 관계가 반복적으로 흔들려왔다는 점에서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적지 않다. 송전망이나 가스관 연결 역시 막대한 투자비와 에너지 안보, 사업성 등에 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
그럼에도 최 회장이 경제계 차원에서 한일 협력의 범위를 ‘교역 확대’에서 ‘경제권 통합’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보호무역과 공급망 재편이 일상이 된 시대, 한국과 일본이 각자 버틸 것인지 아니면 시장과 산업 인프라를 연결해 새로운 경제권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진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