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박진권 기자 | “당시 온종일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11시까지요. 빛이 없는 밤이면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스윙 연습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하고 나서 프로 테스트에 합격했습니다.” 1960년대 말, 중학생인 조호상은 고양시에 생긴 뉴코리아 CC에 주말 캐디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어떤 운동이건 잘했지만, 그는 흰색의 조그만 볼을 쳐내는 골프가 마음에 쏙 들었다. 70년대 초 익산의 9홀 팔봉골프장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했다.
EDITOR 박진권 자료 및 사진 한국프로골프40년사
1978년 말년 휴가를 받고 출전한 한국프로골프선수권 대회
“그냥 내 게임만 잘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우승 상금이 50만 원이었거든요. 세금 25%를 떼니 37만 원입니다. 친한 선수 7명이 저녁과 함께 축하주를 마시면 남는 게 없었습니다.”
조호상의 KPGA 회원 번호는 49번이다. 1973년 10월 26일에 입회했는데, 그 해 입회자는 그를 포함해 6명에 불과했다. 2년 전에 충원된 뒤로 2년 만이었다. 그 뒤로도 매해 2명~3명 정도로 가뭄에 콩 나오듯 프로가 되던 시절이었다. 연습을 위한 장소와 여건이 열악했다. 프로 테스트도 그만큼 어려웠다. 조호상은 골프장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보다 빨리 프로가 될 수 있었다.
어려웠던 프로 테스트를 3번 만에 통과하면서 프로가 됐다. 1974년 서울의 연희연습장으로 옮겨 레슨을 하다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를 몇 달 남겨놓고 말년 휴가를 받아 출전한 대회가 한양CC 구 코스에서 열린 KPGA 선수권 이었다. 군인 신분으로 참가한 대회에서 278타로 최윤수를 5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거머쥔다. 제대 후 투어에 복귀하고는 1980년에 오란씨 오픈에서 , 조태운을 한두 타 차이로 앞서 우승을 차지한다.
2년의 짧은 전성기
“마지막 라운드 날은 감기로 고생했습니다. 6번 홀을 마쳤을 때 당시 선두였던 최상호 프로에 6타 뒤져 있었습니다. 거기서 갑자기 컨디션이 회복됐습니다. 16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선두로 올라섰습니다. 이 대회 역시 새로 창설된 대회였습니다. 상금이 1005만원으로 당시에는 가장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막판에 따라잡고 우승한 만큼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조호상은 1984년에서 1985년에 각각 2승씩 거둔다. 1984년 부산CC에서 첫 대회로 열린 팬텀 오픈에서는 둘째 날 7홀 연속 버디를 하며 63타를 바탕으로 우승했다. 당시 최다 홀 연속 버디에 최소타 기록이었다. 관악 CC에서 열린 일간스포츠 오픈 우승은 드라마틱했다. 해가 바뀐 1985년 유성CC에서 열린 챔피언 시리즈에서 조태호에 1타 차, 한국오픈에서는 최윤수에 1타 차로 우승한다.
그해부터 서초동 남부골프연습장을 운영하면서 필드에 나갈 기회가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이듬해엔 1986년 챔피언 시리즈 4라운드를 끝내고 나니 동생인 조철상 프로와 연장전을 벌이게 된다. 연장 2홀까지 승부가 나지 않자, 형인 조호상이 기권한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함을 기본으로 한다. 그것을 어겼기 때문일까? 조호상은 서서히 순위가 떨어진다. 1992년 11회 매경오픈에서는 우승 기회도 있었다. 첫날 65타를 치면서 감을 회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 73타로 쳐졌다. 끝내 토드 해밀턴, 대만의 임길상에 한타 차로 3위에 머물게 된다. 그 이후로는 참가하는 대회마다 순위가 내리막을 탔다. 지금 생각해도 그 기회를 놓친 게 천추의 한이다.
골프 선수는 필드에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어떻게 쳐야 할지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입스 이후로는 막막해지는 겁니다. 시니어 시합에 나가서 92타를 친 적도 있습니다. 한 홀에 OB, 네 방을 낸 적도 있습니다. 아마 필드에 있다가 연습장으로 옮기고부터 그런 것 같습니다.”
90년대 후반 드라이버 입스가 온 뒤로 대회 참가를 하지 못했다. 이후 15년 동안 입스로 고생했던 얘기를 차분히 털어 놓았다. 드라이버 입스를 고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보았다. 스푼으로도 쳐보고, 강한 드라이버와 약한 드라이버로도 쳤다. 하루 600개 이상씩 볼을 치면서 연습했다. 그러나 필드에서는 어김없이 무너졌다. 허탈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기도로 평정을 찾았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기도를 나갔다.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입스만 고쳐진다면 다시 어떤 대회든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상금 1등부터 꼴등까지 다 경험했다. 대회 우승을 해보았으니 그 기분도 아주 잘 알 것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골프선수는 필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팔봉골프장에서 연습할 기회가 주어진 덕에 일찍 프로가 됐다. 그러나 연습장 사업을 하면서부터 입스가 왔다고 생각했다. 골프선수는 골프장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면 요즘 선수들이 부럽다고 했다. 많아진 대회, 넘치는 상금에 부족한 것 없는 장비까지. 그는 젊은 선수들이 부럽지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선수 들이 건방지다는 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잘 칠 때 잘난 척해야지 언제 하냐는 것이다. 젊은 선수가 건방져질 수있다면 그는 선수로서 성공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런 선수가 오히려 예뻐 보인다고 말한다. 젊고 잘하는 선수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저 부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생년, 1956년 03월 19일
입회, 1973년 10월 26일
국내 6승
1978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1980년 오란씨오픈
1984년 팬턴오픈, 일간스포츠오픈(포카리스웨트)
1985년 챔피언시리즈, 한국오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