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만 계셨나요”… 연극, 루쉰의 '축복', 인형과 배우로 되살아난 침묵의 비극

  • 등록 2025.06.19 21: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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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과 배우가 함께 그려낸 한 여인의 비극, 침묵의 시대를 고발하다
외면당한 축복과 방치된 고통, 무대 위에 되살아난 사회의 거울
“왜 보고만 있었나요”… 구경꾼의 시선 아래 무너진 삶의 잔해들

 

지이코노미 유주언 기자 | 중국 문호 루쉰의 단편소설 '축복'이 하이브리드 인형극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감동의 무대로 재탄생했다. 몰락한 여인의 삶을 통해 인간성과 사회의 외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 작품은 무심히 지나쳤던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다. “당신은 왜, 보고만 있었습니까?”

 

비극의 의식, 연극으로 깨어나다
공연창작소 숨이 주관한 신작 연극 '축복'이 오는 7월 2일부터 6일까지,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서 무대에 오른다. 공연은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3시에 진행된다. 루쉰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번 작품은 ‘하이브리드 인형극’이라는 독창적인 형식을 통해 인간의 무관심과 방관의 폭력을 정면으로 조명한다. 인형과 배우가 동시에 등장해 표현하는 이중적인 감정선은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며, 관객들에게 깊은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축복'은 20세기 중국 격변기의 비극을 무대에 올린다. 특히 이 작품은 루쉰의 소설을 단순 각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형극의 요소를 절묘하게 접목하여 ‘하이브리드 무대극’이라는 독특한 장르로 구현되었다. 인형과 인간 배우가 공존하며 전달하는 감정은 관객의 심장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비극의 굿판… 외면이 낳은 신파극
주인공 샹린댁은 전통 유교사상과 봉건적 관습, 가난과 성차별, 종교적 편견 속에 점차 말라간다.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고, 그녀의 삶은 공동체의 시선과 비난 속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그 비극은 무대 위에서 마치 한 판 굿처럼 펼쳐진다. 관객은 이 굿판을 보며 어느새 본인의 삶과 태도를 성찰하게 된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 축복의 폭죽소리 속에 사라지는 장면은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인형과 인간 사이… 시대를 넘는 통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인형’이다. 샹린댁은 인형으로도, 배우로도 표현된다. 관객은 그녀의 얼굴이 숨겨진 인형을 통해 사회적 틀에 갇힌 인간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 인형은 감정을 노출하지 않기에 더욱 상징적이다. 무표정한 인형의 얼굴에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가 더해질 때, 인물의 내면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고통받는 여성의 삶은 과거의 일이 아니며, 지금 여기에도 존재함을 절감케 한다.

 

시대를 초월한 루쉰의 목소리
루쉰은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축복'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여성에 대한 억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표작 중 하나다. 연극은 루쉰의 사상을 현대적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인간의 구원 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질문, “왜 그때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가?”는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관객은 단순한 문학적 감상이 아니라 실존적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질문
연출을 맡은 정욱현 감독은 “무언가를 강요하는 작품이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한 삶들”에 대해 우리는 무죄한가? 작품은 이 질문을 극의 전개와 함께 끈질기게 제시하며 관객의 내면을 건드린다. 샹린댁의 목소리가 단순한 허구의 인물이 아닌, 우리 곁의 수많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다시 묻는다.

 

창작진의 진심이 만든 무대
각본을 맡은 이주영, 무대와 조명, 음악, 인형 제작까지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완성도 높은 무대를 완성했다. 특히 안무 조아라와 인형움직임지도 김경란의 협업은 ‘인형이 곧 인간이 되는’ 전환의 미학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배우와 인형이 하나가 되는 장면은 마치 혼이 실린 퍼포먼스처럼 느껴진다. 조명, 음향, 소품, 의상까지 세심하게 짜인 무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몰입을 가능케 한다.

 

“인형이 울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연극 '축복'을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무대 위에서 한 여인이 몰락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그녀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인형 속에 감춰진 샹린댁의 얼굴은 곧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수많은 약자들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인형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와 결합된 그 인형이 떨리는 손끝을 보일 때, 관객은 오히려 더 생생하게 고통을 느낀다. 그건 연극이기 이전에 ‘현실의 한 단면’이었다.

 

무대를 떠나 극장을 나서면서도 “왜 아무도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이 따라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나는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했을까”라는 자기반성으로 바뀌었다. '축복'은 그저 눈물 짓고 끝나는 비극이 아니다. 무언가 마음속을 눌러놓고, 생각을 붙들어두는 진한 잔상이다.

 

말없이 굶어 죽는 여인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려면..., 어쩌면 지금부터라도, 누군가의 삶을 ‘보고만 있지 않는 것’이 시작일지도 모른다.

 


 

유주언 기자 invgues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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