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서주원 기자 | ‘새싹 농부’로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진안군 농어민위원장 천춘진 박사는 부귀면 신정리 출신으로 1971년생이다.
천 박사는 진안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장승초등학교와 진안중학교, 전주농림고등학교 그리고 연암축산원예전문대학을 차례로 졸업했다.
연암축산원예전문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경농업대학에서 10년간 학업에 정진했다. 동경농업대학원에서 채소생리생태학분야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에 걸맞은 직장도 잡았다. 일본의 친환경 농자재 회사인 가와다연구소에서 2년간 근무했다.
유학 후 12년 만인 2004년 귀국해 고향인 진안에 귀농했다. 새로운 농민운동과 농업에 전념해 대한민국 6차 산업을 선도했다. 2021년엔 신지식농업인상을 수상했다.
귀농 후, 성공이 보장되는 교수직과 연구소 연구원 제안도 받았지만 마다하고 묵묵히 농부의 길을 걸었다. 농부의 길을 탄탄하게 다진 뒤, 지금은 한국농수산대학 장기현장 지도교수를 맡고 있다.
천 박사는 새싹을 통해 농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 자칭타칭 ‘새싹 농부’라 불린다. 그가 설립한 회사는 농업회사법인 주식회사 ‘애농’.
농부의 길은 무모한 도전이고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탯자리가 있는 진안에서 농촌의 성공모델을 만들려고 농업에 투신한 뒤, 농부의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 어린잎 채소와 새싹이라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농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세월이 흘러 천 박사는 성공한 농업인으로 우뚝 섰다. 2015년엔 농식품부가 주관한 ‘6차 산업화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Q. 일본 유학과 직장 생활 접고, 귀국·귀농한 이유는?
A. 유학 중이던 1993년에 일본에 냉해가 심했다. 일본에 큰 흉년이 들었다. 단 한 번의 냉해로 일본 쌀 생산량은 현저히 줄고 그해 쌀이 부족해져 쌀값이 폭등했다. 일본인들은 불안에 빠졌다. 쌀을 구하려고 슈퍼마켓 앞에 50m, 100m씩 줄을 섰다.
그 실상을 보면서 한국의 농업 현실을 헤아려 보았다. 쌀을 제외하면 95% 이상의 곡물을 수입하는 한국도 그런 식량 위기를 겪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과 내 고향 진안의 농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한국인·진안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귀국과 귀농을 결심했다.
Q. 새로운 농민운동도 귀국·귀농의 주된 이유였다던데?
A. 내 고향 진안에서 어르신들을 받들어 모시고 친구, 선후배님과 어울려 희망찬 미래를 열어보겠다는 각오로 새로운 농민운동을 펼치려 일본에서 영구 귀국했다.
귀국·귀농 당시 내가 새로운 농민운동의 키워드로 삼은 덕목엔 자립, 과학, 협동도 포함됐다. 역점을 둔 농민운동의 핵심은 ‘계몽운동’이었다.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하는 일도 좋요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진안농업의 선진 모델을 만드는 것이 내 새로운 농민운동의 목표였다.
Q. 귀국·귀농 초기 어려움은?
A. 12년간 일본 유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진안에 사시는 부모님께 생활비나 학비를 요청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홀로 진안에 사셨는데, 일본 유학비를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학비를 마련하려 새벽 2시 50분에 일어나 신문도 돌렸다. 수업이 끝나면 도시락 배달을 하는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게 유학 생활을 마쳤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민간 연구소에서 2년 근무했다. 직장 생활이 길지 않아 모아둔 돈이 적었다. 귀국 전, 퇴직금과 저금 등을 모두 합하니 우리 돈 800만 원에 불과했다. 그 돈을 들고 귀국·귀농했다. 더욱이 당시 아내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푼돈 800만 원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가까운 농협에 대출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국내에서 단 한 번도 취업한 적이 없고, 지으려는 농사가 수익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 대출 거절 이유였던 것 같다. 당시 내 처지로는 금융권에서 돈 1,000만 원도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20여 평의 작은 비닐하우스를 짓고, 실험실을 꾸렸다. 인근에 있는 400여 평의 비닐하우스를 임대해서 어린잎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직접 키운 어린잎 채소로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Q. 진안 농민운동 위해 대학 교수직도 버렸다던데?
A. 농민운동을 병행하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대학 교수로 모시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 제안을 어렵게 물리쳤다. 진안 농업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허물어뜨릴 수 없었다. 대학교수로 가지 않고, 진안에 머물며 농업과 농민운동에 전념했다. 그 세월이 벌써 20년째다.
우리 진안군을 대한민국 최고의 농촌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각오와 도전, 그리고 투지는 오늘도 변함없다.
Q. 마을 이장 경력도 있다?
A. 부귀면 서판마을 이장을 역임한 바 있다.
Q. 진안군친환경농업인연합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A. 흙을 살리고 국민건강을 생각하는 농사를 지으려고 그런 직책도 맡은 바 있다.
Q. 한국신지식농업인 전북지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A. 그 시절엔 진안을 넘어 전라북도, 더 나아가 대한민국과 세계의 농업을 더 깊이 탐구했다.
Q. 현재 맡고 있는 사회적 직책은?
A. 진안군 정책자문 위원이고, 한국농수산대학 장기현장 실습 교육 현장 교수도 맡고 있다.
Q. 한국농수산대학 장기현장 지도교수의 보람은?
A. 보람이 크다. 전국 농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산업이고, 농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Q. 농업회사법인 주식회사 ‘애농’의 사훈은?
A. ‘농업은 국가의 근간이요, 국민건강은 국가의 미래이다’. 사훈을 이렇게 정했다.
Q. ‘애농’은 진안 농산물 판로도 개척했다던데?
A. 애농은 한때 음식점 프랜차이즈를 전국에 10여개까지 운영했다. 새싹 쿠키, 야채 잼, 카레 등의 농산물 가공과 함께 카레 프랜차이즈 식당을 운영하면서 진안 농산물의 판로도 개척했다.
특히 카레에 들어가는 양파의 경우 지역 농가와의 계약재배를 통해 전량 수매를 하는 등 농가소득 증대에도 기여했다. 진안 양파작목반을 최초로 직접 창립해 생산한 양파를 내 음식점 프랜차이즈에 공급했다. 양파 50여 톤을 수매한 적도 있다.
양파뿐 아니라 매장에서는 진안의 친환경 쌀을 소비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청와대까지 보고 된 바 있다.
내가 어려운 프랜차이즈 시장에 뛰어든 것은 소량 다품목 중심의 진안지역 농업의 현실을 감안할 때 농산물 판로에 크게 보탬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Q. 그간 많은 실패를 했다. 농업, 어려운 산업 아닌가?
A. 나는 일반 농민보다 실패를 더 많이 했다. 단순히 농사만 지은 것이 아니어서 그랬다.
내가 귀국·귀농한 주된 이유가 내 자신과 고향 진안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 위함이어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지역의 농민들과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보기 위해 더 많은 도전을 하였기에 더 많은 실패를 했던 것 같다.
다양한 시도와 새로운 제품 개발이 모두 성공한 건 아니다.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실패도 하고, 쓴맛과 손실도 보면서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고충도 이해하게 됐다.
내가 현장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면 농업이 진짜 힘든 산업인 줄 몰랐을 것이고 농민들의 아픔을 잘 몰랐을 것이다. 진안의 농가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에서 농업을 배웠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농업을 전공해 박사 학위도 받았는데, 귀국 후 진안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다보니 농업의 이론과 현장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수박을 예로 들어보겠다. 올여름 수박 한 통의 가격은 1만 8천 원 정도였다. 당장 내다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수확기에 단 하루만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면 수박이 썩을 수 있다. 썩으면 내다 버릴 수밖에.
경험과 실패가 내 자산이다. 실패를 딛고, 절망을 극복하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농업은 정말 힘든 산업이다. 우리 진안의 농부들, 정말 위대한 분들이다.
Q. 진안군 농업 정책에 대한 소견?
A. 진안의 농업직 공무원들이 너무 고생이 많다. 그런데 성과는 미미하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하자면, 과연 군 행정가분들이 농업의 문제점과 방향을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농정은 의지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실천력과 농업 유통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군수가 좋은 농업 정책이라며 담당 공무원에게 실행을 지시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담당 공무원은 막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농산물 유통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론 대기업과 경쟁을 해야 된다. 군이 예산만 세웠다고 해서 판로를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청 농업직 공무원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한다. 그런데 성과가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본에서 유학을 할 때, 지도교수는 해당 분야에 있어서 일본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런 분에게 나는 6년간 지도를 받았다.
그렇게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벌써 20년째 농사를 짓고 있지만 손가락 으로 꼽아보자면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다.
사정이 이런데, 실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을 농업직 공무원들이 진안 농산물의 유통과 시장 개척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진안의 농업 정책이 튼실한 열매를 맺으려면 농업의 현장 경험과 경영이 어떤 것인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지도자들이 나와 군정의 방향을 확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안 농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Q. 진안 농업 발전 자신 있나?
A. 내게 군정을 통솔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수 임기 4년 동안 진안 농업 발전상을 피부에 와닿게 할 자신이 있다.
적어도 난 지난 20년 동안 진안 농업의 미래 청사진을 틈틈이 그려 놓은 진또배기 농부다.
나는 오직 진안의 농업, 전북의 농업,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을 위한 공부를 했다. 진안 농업을 포함한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을 실현하려고 지난 20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때론 눈물 젖은 빵도 먹고, 울음도 삼켰다.
내가 준비해 놓은 진안의 미래 먹을거리를 위한 농업 정책은 매우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안의 농업을 대한민국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방안을 꼭 실천으로 옮기고 싶다.
Q. 진안 농업 발전의 선결 과제는?
A. 진안은 농업을 차별화를 시킬 수 있는 천혜의 여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진안은 이런 여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진안 농업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려면 실무형 행정가가 절실하다. 그 롤 모델은 이재명 대통령이라고 본다. 이 대통령은 성남시장을 거쳐서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여의도에 입성해서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그런 경험 덕분인지 회의나 토론을 할 적, 때론 옆에 배석한 장관이나 차관보다 국정 실무를 더 많이 알고 있지 않는가.
나는 진안 농업의 현실과 미래는 물론 대한민국 농업의 현실과 미래, 더 나아가서는 해외 농업의 현실과 미래까지 기본 맥락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건설적인 발전 방향도 이미 오래전에 잡아 놓았다.
Q. 군수 당선되면 첫 사업이 100% 고추 수매라던데?
A. 만약 군수에 당선된다면 가장 먼저 처리할 군정은 진안군민이 생산한 고추를 100% 수매하는 일이다.
작년 진안 고추 시장에서 유통된 고추 판매량은 약 16만 근이라고 들었다. 한 근을 1만 6천 원씩 계산하면 판매 총액이 27억 원 정도다
농부들이 한 근에 1만 2~3천 원씩 팔면 상인들은 그 자리에서 몇천 원씩 이문을 붙여서 다른 데 넘긴다. 농부들은 집에서 가져 온 고추를 다 팔지 못하면 집으로 다시 갖고 가야 된다.
정말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먹먹한 일이다. 농가는 현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날 시세에 넘기고 귀가하는 것이다.
진안군이 그런 고추를 100% 수매하면 된다. 외지에서 큰 상인들 몇 사람만 유치해도 판매가 가능할 수 있다.
지금은 내게 그런 권한이 없다. 재력도 안 된다. 하지만 군수에 당선된다면 군청에서 100% 사들이겠다. 군 예산 약 30억, 이거 결코 큰돈이 아니다. 농가에서 매입한 가격으로 고추를 외부에 되팔아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내년 6월, 군수에 당선된다면 취임식 직후, 이 공약부터 이행하련다. 그런 다음 군청이 판로를 도울 수 있는 농산물 품목을 늘려나갈 생각이다. 이런 농정을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앞장 서겠다.
Q. 다른 지역처럼 진안 정치의 적폐도 패거리 정치인가?
A. 진안군민들이 공정하지 못한 정치에 신물이 나 있다. 진안의 적폐, 다름 아닌 패거리 정치라고 생각한다.
농민은 농민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런데도 패거리 정치 때문에 다양한 목소리가 군정에 반영되지 않는다.
진안의 유권자는 2만여 명밖에 안 된다. 그러니 패거리 조직 선거가 먹힐 수밖에 없다.
진안의 적폐인 패거리 정치, 내년엔 정말 끝을 내고 싶다. 이 고리를 당장 끊지 못하면 진안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군민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다. 이를 방치하면 진안군의 소멸도 막기 힘들 것이다.
Q. 진안군민의 정치의식, 그 변화 방향은?
A.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고, 그 사람의 과거는 그 사람의 미래도 예견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사정이 이럴진대 진안군민은 각종 선거에서 인물을 보거나 정책을 보고 투표하지 않는다. 지연과 학연에 얽매여 정치 지도자를 선택한다.
대다수의 정치인이 당선 직후엔 초심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정치인이라면 그 누구나 유권자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물론 나 도 그렇다. 늘 좋은 말, 좋은 정책을 전하려고 애를 쓴다.
관건은 실천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것이다. 그 저력은 실행 의지와 실행 능력에 있다. 그 바탕은 인성과 자질과 그 동안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진안의 당면 현안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진안의 농업과 경제를 되살리며, 진안의 미래를 이끌어 보고자 그간 수년간 준비하며 살아왔다.
진안의 보다 나은 미래를 결정할 내년 6월 지방선거, 진안군민의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기대한다.
Q. 진안군 행정을 이끌 기회가 온다면?
A. 진안군엔 약 천 명에 가까운 공무원과 약 6천억에 가까운 예산이 있다. 군수 임기가 4년인데, 4년이면 가용할 수 있는 예산이 2조가 넘는다.
가정을 해보자. 약 천 명의 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약 4조의 예산을 운용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진안의 발전을 이끌 것인가.
나는 내 배와 내 곳간을 채우려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다. 혈세를 펑펑 낭비하는 군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진안군민의 귀한 선택으로 군의 행정을 맡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민들이 잘 먹고 잘 살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 사시는 출향 향우들이 진안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행정을 펼칠 것이다.
Q. 진안의 희망찬 미래, 어떻게 열고 싶나?
A. 30년간의 지방자치, 미래는 암울하다.
그간 헛발질을 한 지자체 단체장이 많았다. 귀중한 예산을 허투루 쓴 단체장도 많았고, 본인의 실정에 책임을 진 단체장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폐습은 진안군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 단체장이 집권할 때면 진안군민의 한 사람으로서 좌절감도 컸다.
정치권에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는 어떤 군민은 내게 충고를 서슴지 않았다.
“정치, 뭣 하러 뛰어들어. 너 먹고 살길이나 챙겨! 네가 그런다고 진안의 정치가 바뀔 것 같냐?”
군수 선거는 단지 한 철의 지방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군민의 바람이 계속 이어져서 진안의 건전한 시민 단체와 여론을 만들어내고, 다채로운 목소리가 대접을 받고, 군정에 반영되도록 해야 될텐 데, 지금까지 과연 그랬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내년 진안군수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나이 19세에 ‘농민독본’이라는 책을 쓰고, “우리의 생명 창고는 농업이다”라고 외쳤던 윤봉길 의사의 외침을 마음에 품고 우리 진안군 농업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