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차별, 박해에 대항했던 ‘위대한’ 흑인 골퍼들

  • 등록 2017.03.13 09: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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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나간 시간이 응축돼 삶의 모습을 후세에 전해주는 거울이란 말이 있다. 당대에는 현상적인 것만 비춰지기 때문이 평가를 내리기 어렵지만 과거에 투영된 모습을 훗날 다시 보자면 역사의 단면을 보면 통시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스포츠도 이 거울 이론에 따라 살펴볼 수 있다. 스포츠 전반적으로 살펴보자면, 당시 일어난 일들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만, 후에 반추해봤을 때 스포츠의 역사는 생명력을 가진다. 
오늘날의 거울을 비쳐 과거 스포츠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스포츠는 인류 진화의 역사이자 인종 차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스포츠에서 인류 진화와 인종 차별은 우생학(優生學)에 기인했다. 우생학이란 유전 우열을 인정해 멸시, 박해, 차별 따위를 정당화하는 사고방식 전반을 말한다.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관념, 그것이 우생학의 본질이다.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이 우생학에 대한 수용과 그에 대한 부정을 통해. 이번 시간에는 골프와 인종차별의 역사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보려고 한다.  

Editor 방제일  

1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PGA 투어에 흑인 골퍼는 극소수

미국 골프는 1888년에 시작해 2017년인 오늘날까지 약 13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초창기 골프를 시작한 최초의 그룹은 영국 상류 사회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백인 중산층이었다. 그들은 골프를 사교 모임과 동시에 취미로 즐겼다. 그들만의 협회와 리그를 형성해 골프 대회를 열고 필드 위에서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골프는 미국에서 일반 중산층이 즐기는 스포츠이자 레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보이지 않는 인종장벽은 꽤나 높았다. 특히 흑백갈등이 심했던 미국 남부에서 흑인의 경우 골프선수가 되거나 회원제 클럽에 가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백인 사교집단인 회원제 골프장이 인종차별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 골프의 역사에서 최초의 흑인 골퍼가 대회에 등장한 것은 1896년 US오픈 골프대회였다. 당시 시네코크 골프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캐디로 일하던 존 시펀은 17세의 나이로 대회에 출전했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이었기에 투어 프로들은 시펀이 대회에 나오면 보이콧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나 당시 미국골프협회장인 시어도어 헤이브메이어가 시펀을 지지하면서 시펀은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Jackie Robin OF Golf’, 찰리 시포드  

찰리 시포드


그 이후 프로 흑인 골퍼인 찰리 시포드가 등장하기까지는 약 6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흑인의 골프를 개척하는 이는 지난 2015년 92세 나이로 타계한 찰리 시포드다. 온갖 위험과 주변의 비웃음 속에서 골프채를 놓지 않았던 시포드는 흑인은 PGA 투어에 참가할 수 없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온 몸을 다해 저항한 인물이다. 시포드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위치한 샬럿에서 태어나 캐디로 처음 골프를 접한다. 그는 골프가 너무 하고 싶어 땅거미가 질 무렵 필드에 몰래 숨어 들어 골프를 접했다. 도둑골프를 치다가 총을 든 관리인에게 적발돼 목숨을 걸고 도망을 가기도 했던 시포드는 훗날 이를 회고하며 “골프를 멈추기도 싫었지만 총 맞아 죽기도 싫었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시포드가 활약하던 당시 PGA는 투어에 흑은의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없었다. 따라서 흑인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상금 규모가 작은 지역 투어나 니그로내셔널오픈 등 흑인들만의 대회뿐이었다. 시포드의 재능은 의심할만한 여지가 없이 탁월했지만 인종차별은 그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그는 1952년부터 니그로내셔널오픈에서 5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지만 PGA 투어의 인종 차별 룰에 따라 투어에 데뷔하지 못했다.  
PGA 투어는 1960년 백인만이 PGA 멤버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시대적 조류에 따라 수정했고, 시포드는 그 이듬해인 1961년 PGA 투어 멤버가 될 수 있었다. 그는 PGA 투어 입문에 대해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시포드의 PGA 도전기는 그레이터 그린스보로 오픈을 시작한다. 그 후 시포드는 불굴의 의지로 골프 역사에 흑인 최초의 발자취를 남긴다. 1967년 그레이터 핫퍼드 오픈 우승, 1969년 로스엔젤레스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PGA 투어 우승자 명단에 이름이 올렸고, 1975년에는 52세 나이로 시니어챔피언십에서도 1승을 달성한다. 2004년에는 흑인 최초로 세계골프 명예에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전설적인 골퍼 시포드에게 있어 골퍼로의 평생의 꿈은 마스터스가 열리는 조지아주 오거스터 C.C에 발을 디디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절히 원했던 시포드의 소원은 끝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마스터스에 흑인이 출전하는 시포드의 간절한 바람은 10년이 지나 1975년 흑인 골퍼 리 엘더가 마스터스에 출전하면서 이뤄진다.  

‘마스터스’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리 엘더 

리 엘더


리 엘더는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마스터스에서 출전했고, 이는 마스터스 역사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당시 초청대회 성격의 인비테이셔널로 치뤘던 마스터스 대회는 흑인 골퍼의 성적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오랫동안 참가를 제한해 왔다. 그러던 중 리 엘더가 마스터스에 초청된 것이다. 엘더는 공식적으로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C.C에 캐디가 아닌 골퍼로서 잔디를 밟아본 최초의 흑인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참가 자격이 엄격했던 오가서트에 있어서 이는 큰 사건이자 새로운 역사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찰리 시포드와 마찬가지로 리 엘더 또한 당시 수많은 살해위협과 협박을 받았다. 엘더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75년 마스터스 대회 참가 당시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해 자신을 노리던 자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 엘더는 두 군데 이상의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 리 엘더는 PGA투어 4승과 시니어 투어 8승의 성적을 거둔다. 1979년에 열린 라이더 컵(Ryder Cup)에는 흑인 최초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또한 골프 개방화 이후 새로운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변곡점으로 현재는 남아있다.  

우즈 이전의 우즈, 캘빈 피트  

우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PGA 투어에서 가장 큰 활약을 거둔 이는 캘빈 피트였다. 피트는 1980년대 PGA 투어에 활약했다. 그는 인종차별 뿐 아니라 신체적인 핸디캡을 극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트가 어린 시절 나무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왼팔을 완전히 펼 수 없었다. 이런 신체 결함에도 피트는 1981년부터 10년 연속 드라이버 샷 정확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4년에는 최조 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주는 ‘바든 트로피’를 수상하기도 했던 피트는 엘더에 이어 라이더컵에서도 두 차례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피트는 당시 대부분의 흑인들과 같이 가난한 가정에서 아홉 명의 자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시절 콩과 옥수수를 주워가며 돈을 벌었던 피트는 골프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골프에 입문한다. 그가 처음 골프채를 잡은 건 24세 때로 알려져 있다. 이후 6개월만에 80대 타수의 벽을 깼고, 1년이 지나자 언더파를 기록하며 주변의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는 신체적인 한계에도 드라이버를 칠 때마다 놀라운 절도로 정확한 페어웨이 적중률을 보여줬다. 우즈 이전의 우즈는 피트였다.  

인고의 시간을 딛고 나타난 타이거 우즈, 그리고 비제이 싱   

비제이 싱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흑인들의 희망이자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쓸 흑인의 등장은 피트 이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찰리 시포드, 리 엘더, 캘빈 피트의 이름을 아는 아마추어 골퍼는 드물 것이다. 그들이 남긴 발자취는 위대했으나 골프 전반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 반면 골프를 즐기든, 즐기지 않든 누구나 아는 흑인 골퍼가 있다. 예상했겠지만 그는 타이거 우즈다. 우즈는 1994년 아마추어 대회를 석권하고 1996년 프로 전향을 선언하며 화려하게 PGA 투어에 등장했다. 우즈의 데뷔는 골프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만, 그 보다 더 큰 의미는 그가 백인들이 주를 이루던 골프에 흑인으로서 당당하게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1994년 미국 아마추어 대회를 석권한 우즈는 1996년 프로 전향하며 전 세계 골프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데뷔 해에 PGA 투어에서 2승을 거둔 우즈는 1997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메이저대회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골프 역사에 기리 남을 발자취를 걷고 있는 타이거 우즈는 1997년 흑인으로는 최초로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 후 타이거 우즈의 행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우즈가 처음 마스터스에서 우승했을 때 찰리 시포드는 “타이거 우즈는 나의 투쟁을 가치있게 만든 인물”이라면서 “우즈는 내가 걸어온 길이 이유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한 화답이었을까, 아니면 시포드에 대한 존경이었을까. 우즈는 자신의 첫째 아들의 이름을 ‘찰리’라 지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정작 흑인 아버지와 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우즈 자신은 인종 차별과 같은 정치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우즈는 1997년 미국프로야구 첫 흑인선수였던 ‘위대한 도전자’ 재키 로빈슨의 기념식에 당시 대통령이던 빌 클린턴의 초청을 받았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흑인 사회로부터 꽤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런 비판에 대해 우즈는 공식적인 해명을 내놓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흑인으로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낸 적은 있다. 1997년 마스터스 우승 뒤 출연한 TV 프로그램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자라면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란 말을 자주 들었으며 그때마다 거부감을 느꼈다”면서 자신을 ‘캐블리내시안(Cablinasian)’으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코카서스 백인과 흑인, 인디언, 아시안의 영어 머리글자를 혼합해 그가 만든 신조어였다. 우즈는 자신의 아버지가 백인과 흑인, 인디언 혼혈이고 어머니가 태국인이라 자신은 태국, 중국, 흑인이 각각 4분의 1, 백인 8분의 1, 아메리카인디언 8분의 1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우즈의 여인들은 전부 백인들이었다. 타이거 우즈의 스캔들 때 그와 내연 관계에 있었던 여성의 수는 6~7명 선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우즈의 부인을 비롯해 그의 내연녀들까지 모두 백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즈가 바라보는 자신과 흑인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단면이다. 따라서 흑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우즈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골프에서 인종 장벽을 무너뜨리고 정상에 우뚝 선 우즈는 흑인이라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말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우즈의 블랙 콤플렉스의 단면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흑인 사회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지만 우즈의 행태 또한 정당한 것이다. 인종을 넘어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히는 것에 그 누구도 비판할 수는 없다. 이런 우즈와는 다른 길을 걸은 골퍼로 이제는 추억이 이름의 된 ‘비제이 싱’을 꼽을 수 있다.  
비제이 싱은 우즈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그린 재킷을 입은 흑인 챔피언이다. 우즈는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한 때 그는 우즈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던 도전자였다. ‘엘리트 코스’, 흔한 말로 꽃길만을 걸어온 우즈와 달리 싱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가시덤불 길이였다. 비제이 싱은 피지출신으로 독학으로 골프를 배웠다. 한때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에서 클럽프로로 일하며 레슨과 골프용품 판매로 생계를 이어 가기도 했던 싱의 삶은 굴곡으로 얼룩져 있다. 그래서 우즈와 달리 싱에게는 고난과 역경의 흑인 골퍼의 역사가 오버랩되기도 한다.  

첫 흑인 여성 골퍼, 알시아 깁슨 

알시아 깁슨

골프에서 흑인 못지 않게 차별과 박해를 받았던 것은 여성이었다. 최초의 여성 골퍼는 메리 스튜어트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스튜어트 여왕이 골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왕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LPGA, KLPGA 등 여성도 골프를 자연스럽게 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영국의 자랑인 세인트 앤드류 골프장 올드코스 18번홀 그린 뒤에는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No Dog Or Women Allowed’라는 문구다. 여성과 흑인, 이 두 가지 차별에 도전했던 최초의 흑인 여성은 알시아 깁슨이다. 그는 뉴욕 할렘가에서 자랐다. 알시아 깁슨이 위대했던 이유는 그가 흑인, 그것도 여성에게 편견과 박해를 가했던 두 가지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흑인에게 장벽이 높은 대중적인 스포츠는 골프와 테니스다. 알시아 깁슨은 이 두 가지 스포츠에서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편견과 차별에 도전했다. 시포드보다 앞선 1957년 9월 8일 US오픈(테니스) 최초로 흑인 선수가 우승을 차지한 그 날의 주인공은 알시아 깁슨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보다는 다양한 스포츠를 관심이 있었던 깁슨은 테니스와 유사한 패들테니스(일반 테니스보다 작은 코트와 짧은 라켓, 스펀지 공을 사용하는 경기)에서 재능을 보였다. 12세에 지역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실력을 뽐내자 이를 눈여겨본 봉사활동 관리자가 깁슨에게 테니스 라켓을 사주며 뉴욕의 흑인 테니스 클럽을 소개했다. 
본격적으로 테니스를 시작한 깁슨은 ATA(Amercian Tennis Association, 흑인 중심의 미국 테니스 연합)가 주최하는 성인 대회에서 첫 출전 만에 준우승을 거두며 잠재력을 드러냈다. 흑인 테니스 선수들을 후원하고 있던 월터 존슨 박사 역시 깁슨의 능력에 주목했다. 학교보다 길에서 뛰어 노는 시간이 많은 활발한 아이였던 깁슨은 이때까지만 해도 스포츠맨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나 존슨 박사를 만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존슨 박사는 깁슨의 멘토이자 후원자로 그녀가 테니스 선수로 자라나도록 도와줬다. 

깁슨은 ATA 대회에서 맹활약했으나 US오픈에는 출전할 수 없었다. 당시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미국테니스협회에서 흑인인 그녀가 백인들과 경기를 펼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US오픈 4회 우승자인 앨리스 마블(미국)이 아메리칸 론 테니스 매거진의 지면을 빌려 이 사실을 폭로했다. 깁슨의 출전을 허가하라는 여론이 거세지자 결국 US오픈은 그녀에게 대회 초청장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흑인 최초의 그랜드슬램 출전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1950년 8월 28일, 23번째 생일이 갓 지난 깁슨은 1회전에서 바바라 크냅(영국)을 6-2 6-2로 꺾고 그랜드슬램 첫 승을 신고했다. 2회전 상대는 윔블던 3회 우승자 루이즈 브로우(미국)였다. 깁슨은 첫 세트를 1-6으로 내줬으나 두 번째 세트를 6-3으로 획득해 세트올을 만들었다. 마지막 세트 7-6으로 앞선 상황에서 우천으로 경기가 하루 연기됐다. 다음날 깁슨은 연달아 세 게임을 내줘 자신의 첫 번째 그랜드슬램을 아쉽게 마감했다. 깁슨은 이듬해 윔블던에서도 흑인 최초로 대회에 출전해 역사를 새로 썼다. 
윔블던 우승 이후 깁슨은 통산 그랜드슬램 단식 5회, 복식 6회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녀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픈시대 이전 아마추어 선수들만 출전 가능했던 그랜드슬램은 우승 상금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테니스의 여왕이 되는 것은 기쁘다. 그러나 왕관을 먹고 살 수는 없다”며 1958년 프로로 전환했다. 그러나 여자 프로 대회 역시 상금 규모가 크지 않자 깁슨은 골프로 관심을 돌렸다. 1964년 LPGA에 나선 첫 번째 흑인 여성 선수로 기록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했다. 호텔에서는 그의 숙박을 거절했고 클럽하우스 출입도 막혀 차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깁슨은 세계 27위까지 오르는 등 1971년까지 골프 선수로 활약하다 은퇴했다.은퇴 이후에도 깁슨은 스포츠와 관련된 일을 이어갔다. 1970년대에는 지도자 생활을 했고, 뉴저지 주 의회에서 체육부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깁슨은 1980년대 후반 두 차례 뇌출혈, 1992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나 여전히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랜드슬램 우승 당시 복식 파트너였던 안젤라 벅스톤(영국)의 도움으로 성금을 모아 겨우 치료를 받았으나 건강은 계속 악화됐다. 깁슨은 2003년 9월 28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샤이엔 우즈


깁슨 이후 이렇다할 활약을 펼친 흑인 여성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현재 LPGA 투어에는 우즈의 사촌인 샤이엔 우즈와 세디나 팍이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등록돼 있다. 한국인인 에디터로서도 한국 여자 선수들의 활약이 반갑지만, 골프의 세계화와 대중화를 위해 더 많은 흑인 여자 골퍼들이 나왔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다. 

 '단지 플레이만 할 수 있게 해 달라(Just Let me play)' 

인종 간의 벽이 허물어진 현재에도 흑인들을 PGA나 LPGA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유다. 흑인들의 신체 능력의 탁월함은 타 스포츠를 통해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 다만 그들에게 있어 골프나 테니스 등의 스포츠는 확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비용이 소모된다. 골프나 테니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하기에는 농구나 야구, 미식축구, 육상, 축구 등 보다 경제적이고 인프라가 탄탄한 스포츠가 있기 때문이다. 우즈와 같진 않아도 천문학적인 단위의 액수를 만질 수 있는 더 큰 기회와 가능성이 있기에 골프나 테니스에는 소수의 흑인만을 앞으로도 접할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그럼에도 그 소수의 흑인들이 기대되는 이유는 앞선 흑인 개척자들이 보인 골프에 대한 애정과 헌신, 그리고 골프의 정신 때문이다.  
최초의 골프는 어떤 계층 구분 없이 공터에서 하던 놀이였다. 민중 놀이에서 시작된 골프가 과거 계급 배타성이 짙은 스포츠 문화로 변질된 것은 오만이자, 우생학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다.  

 '단지 플레이만 할 수 있게 해 달라(Just Let me play)’, 찰리 시포드의 자서전 제목과도 같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누구나 골프를 플레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reijiro 기자 reij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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