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리사로 살아온 지난 20년은 무형의 아이디어를 유형의 권리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누군가의 영감을 법적 테두리 안에 안착시키고 ‘등록번호’라는 보호장치를 부여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때로는 그 견고한 법의 울타리가 진정한 권리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역설적인 순간과 마주한다. 최근 대법원 판결로 다시 회자된 ‘101번지 남산돈가스’ 사건이 바로 그런 사례다.
남산을 찾는 이들이라면 주황색 간판의 돈가스집을 한 번쯤 마주했을 것이다. 그중 ‘101번지’는 오랫동안 원조의 상징처럼 인식돼 왔다. 그러나 그 간판 뒤에는 1992년부터 터를 닦아온 한 임차인의 시간이 존재했다. 건물주는 임차인을 내보낸 뒤 ‘Since 1992’라는 역사와 주황색 간판이라는 상징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상표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했다. 타인의 시간을 가져다 쓴 이 행위는 결과적으로 ‘합법의 외형을 가진 약탈’에 가까웠지만, 당시 법은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법원은 긴 공방 끝에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건물주의 허위 주장에 대해 최종적으로 기각 판단을 내리며 진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판결 이후의 현실은 다르다. ‘가짜 원조’라는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101번지’ 상표권은 여전히 유효하고, 전국 가맹점 역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간판에서 ‘Since 1992’ 문구만 사라졌을 뿐, 시장에서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법적 승리가 곧 권리의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 간극은 지식재산권 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핵심 문제는 특정 사업자의 일탈이 아니라, ‘사용의 역사’보다 ‘출원의 시점’을 우선하는 상표제도의 설계에 있다.
최근 제도는 뒤늦게나마 보완을 시도하고 있다. 2024년 8월부터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가 5배로 확대됐고, 2025년 7월부터는 법정손해배상 상한도 높아졌다. 이는 침해 행위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고, 손해 입증이 어려운 권리자에게 실질적 구제 수단을 제공하려는 조치다. 과거 ‘걸려도 남는 장사’로 인식되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는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상표권이라는 형식적 권리를 넘어서, 시장에서 형성된 신뢰와 성과를 보호하려는 방향으로 읽힌다. ‘먼저 낸 자’ 중심의 권리 구조에서 벗어나, ‘정직하게 축적된 가치’를 반영하려는 흐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는 뚜렷하다. 손해배상 강화는 사후적 대응에 머물 뿐, 권리 선점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여전히 타인의 성과를 선출원으로 가져갈 수 있고, ‘덮죽’ 사례처럼 소상공인의 브랜드가 제3자에 의해 선점 시도되는 일도 반복되고 있다.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권리자는 긴 시간과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결국 제도의 실효성은 배상 규모가 아니라 판단 기준에 달려 있다. ‘누가 먼저 등록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시장을 만들었는가’를 가려내는 기준, 그리고 이를 실질적으로 반영하는 집행이 필요하다.
남산의 돈가스집 간판은 오늘도 밝게 빛난다. 그러나 그 불빛 아래에는 한 개인이 쌓아온 시간과 노력의 흔적이 겹쳐 있다. 이제는 법이 형식적 권리를 넘어, 그 시간과 신뢰를 지키는 장치로 작동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