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병자처럼 보여야 증명되나요? 내가 약을 먹는 것도, 병가를 쓰는 것도 조롱받아야 할 이유가 되나요?”
정신질환으로 병가를 쓰던 피해자 A씨가 조직 내부에서 들었다는 말은 차마 옮기기도 민망하다.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 뭔지 아나. 설사에요 설사", "휴직하는데, 직원들한테 내 일 니가 다 맡아서 해라. 그런거다. 직원들의 의견을 물어봤나?", "나 우울증으로 휴직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얘기하러 왔느냐?" 이 조롱과 비하의 언어는 피해자의 증언에 그치지 않는다. 본지가 입수한 녹취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동원산업은 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이 명백한 인권침해에 대해 지금까지도 아무런 사과도, 공식적인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보상만 요구하고 있다”는 식으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이 사안을 감정적 대립으로 치환하고 있다. 즉, ‘회사가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너무 예민하다’는 인식이 내부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직장 내 괴롭힘이나 제도 미비의 문제를 넘어, 조직이 피해자와의 ‘정서적 싸움’을 선택한 사안이다. “내가 왜 내 고통을 증명해야 하느냐”, “왜 내가 회사를 설득하고 증거를 모아야 하느냐”는 피해자의 외침은, 그 자체로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할 절규다.
심지어 피해자는 이 사안을 글로벌 ESG 리스크 평가기관인 RepRisk의 데이터베이스(DB)에 직접 등록했다고 밝혔다. 그는 “내 목소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세계 시장에 이 기업의 민낯을 알리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보복성 대응이 아닌, 피해자가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자 경고의 시그널이다.
RepRisk는 전 세계 금융기관과 글로벌 투자자들이 참고하는 ESG 리스크 정보 기반이다. 해당 DB에 등록된 기업은 신용평가와 투자유치, 글로벌 공급망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즉, 한 명의 직원이 겪은 고통과 침묵 속에서 조직이 보여준 태도 하나가 동원그룹 전체의 ESG 리스크로 연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동원그룹은 오랫동안 ESG 경영을 홍보해왔다. “사람 중심”, “윤리 경영”,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는 대내외 메시지를 반복하며, 공공부문에서 노동친화적 기업이라는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을 통해 드러난 현실은, 그 홍보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중성과 ESG 워싱(E-washing)의 실체다.
사회(Social) 부문에 부합하지 않는 심각한 행태를 내부에서 반복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ESG 우등생인 척하는 이 모습은 국내 소비자뿐 아니라 글로벌 감시체계에서도 점점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고용노동부로부터 ‘노동존중 경영’ 관련 상을 받은 동원산업이, 내부적으로는 직원의 정신질환을 조롱하고 퇴사 압박을 가하는 조직 문화를 방조했다는 점은 기업 PR과 실제 조직문화 간 괴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정부 포상과 ESG 인증, 미디어 홍보가 실질적 인권 의식 없이 작동될 때 벌어지는 위험성을 여실히 드러낸 셈이다.
이제 동원그룹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사안의 본질을 외면한 채 감정적 논쟁으로 프레임을 바꾸려는 시도를 멈추고,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조속한 합의 절차에 나서야 한다. 단 한 명의 직원에게 발생한 인권침해가 그룹 전체의 평판 리스크로 확산되는 지금, 침묵은 더 이상 해법이 될 수 없다.
김남정 동원그룹 회장과 박상진 동원산업 대표이사 등 책임 있는 경영진이 나서야 할 때다. 피해자와의 공식적이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고통을 위로하고, 실질적 재발 방지 대책을 공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ESG의 ‘S’,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며, 기업이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문채형 뉴스룸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