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원 대하소설 '파시' 1] 갑신년 칠산바다의 불구름

  • 등록 2025.10.10 14: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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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코노미 서주원 기자 | 1884년, 변산반도 앞 칠산바다에서도 조선왕조가 저물고 있었다. 갑신년 추석 명절이 지난 음력 팔월 열이렛날 저녁 무렵이었다. 바다는 숨을 죽였고, 하늘에서는 불구름이 흘렀다.

 

칠산바다의 불구름은 구름이 아니었다. 하늘이 토해낸 피멍, 바다가 길어 올린 불길이었다. 수평선은 황혼에 젖고, 은빛 바다는 누런 쇳빛으로 변했다. 물비늘이 번들거렸고, 조기떼가 떠난 뱃길엔 허망한 파문이 길게 흩어졌다. 칼끝 같은 갯바람이 살결을 스칠 때면, 피 냄새가 날 듯했다.

 

남녘 바다 끝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솟았다. 쇠와 불, 증기가 뒤엉긴 괴물이 나타났다. 쇠로 된 바다의 괴수, 화륜선(火輪船)이었다. 조선의 바다를 찢고, 정적을 가르며 다가왔다. 그 굉음과 연기가 칠산바다의 잠든 해신들마저 흔들어 깨웠다. 개헤엄을 치는지, 송장헤엄을 치는지 모를 느린 몸짓으로, 화륜선은 법성포 앞바다를 지나 위도 앞 임수도 근해에 이르렀다.

 

변산반도 적벽강 죽막동 갯가 절벽 위, 수성당 인근 대숲에 두 사내가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도 왕등도 출신 앙얼과 고군산 비안도 출신 꺼꾸리다. 올해 서른셋, 동갑내기인 이들은 조운선을 노리고, 고깃배를 털고, 섬사람과 육지 사람의 멱까지 따는 바다의 도둑인 해적이다.

 

앙얼이 낮은 소리로 꺼꾸리에게 물었다.

 

“저것이 고깃배여, 상선이여, 군함이여?”

“글씨다. 암만혀도 상선 같은디?”

 

“내 보기엔 군함 같은디, 저 이무기가 시방 얼로 간디야?”“접때도 저 화륜선 땜시 짜구 성님허고 짱독 성님이 야글 나누다가 맥살을 잡고 대판 붙었는디, 짜구 성님이 그러든만, 저 이무기가 군산으론 갱물이 얕아서 못 들어가고, 갱물이 깊은 저 저 인천으로 간다고.”

 

꺼꾸리가 형님이라고 언급한 짜구와 짱독 역시 해적이다.

 

“그라믄 저 이무긴 여그 격포도, 곰소도, 줄포도, 쩌그 법성포도 못 들어간다는 거여?”“야 이 미련헌 놈아, 고걸 시방 말이라고 씨부렁거리냐? 군산도 못 들어가는디, 어찌끼 줄포를 들어가고 법성폴 들어가겄냐.”

“이 씨벌 새끼가 어쩌서 또 임뱅지랄을 헌디야? 내 대끄빡이나 니 대끄빡이나 똑같은 돌대가린디, 내가 미련헌 놈이믄 넌 어떤 놈인디?”“헤헤, 니 말이 맞다. 대그빡 안 돌아가기론 니나 나나 오십보 백본디. 헤헤 허허허.”

 

“야, 꺼꿀아!”“뭔 말을 또 헐라고?…얼릉 말을 혀보라고!”“배를 나무로 만들믄 목선이고, 쇳덩이로 만들믄 철선이것지.”

“그러것지.”

 

“나무는 물에 뜨고, 쇠는 물에 까랑지잖여?”

“그리서?”

 

“저 이무기는 쇠덩이 철선이람서 어쩌서 물에 안까장진데?“어쩌 그러는디 나는 모릉께, 오늘 저녁으 비안도서 짜구 성님 만나면 물어 보드라고.”

“뭐 그렇기 허믄 쓰것고, 또 한나 궁금헌 게 있는디, 일본 놈, 때국 놈, 양코백이는 멋헐라고 저렇기 큰 철선을 만들었을까 잉?”“글씨다. 짜구 성님이 그러더만, 일본놈, 대국 놈, 양코백이들이이 나라 조선을 물어뜯을라고 저 이무기 같은 화륜선을 타고 온 거라고.”

 

죽막동에서 수성당으로 넘어오는 갯가 대숲 사이, 두 사내의 낮은 말소리는 갯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갑론을박 속에도 농이 섞였으나, 그들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기댈 사람도, 믿을 질서도 어딘가 뒤집히고 있음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사실 화륜선의 출현은 조선 수군과 조운선의 운명, 그리고 바다에 삶을 두고 살아온 민초들의 숨결까지 뒤틀어 놓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백 년 조선왕조의 앞날 또한 그날, 칠산바다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계속)

서주원 기자 ariko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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