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다”
‘천상의 화가’ 탄지(彈指) 이현주
이현주(51). 그는 화가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 이후 고교 재학 때까지 각종 경시대회에 나가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에선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 이후 대학원에서 다시 선화(禪畵)를 배웠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엔 여러 직업에 매달렸다.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에서 디스플레이 하는 일도 10여 년 했고, 한때 광고업도 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울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 사옥 내벽에 7년간 2,000호 짜리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림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다. 다른 일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최근엔 한해 서너 차례 전시회에도 참가한다. 내년 봄엔 미국 시애틀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 계획을 하고 있다.
‘천상의 화가’. 그의 스승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생각에 경계가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의 꿈은 오직 하나다.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다”
김대진 편집국장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초·중학교 때 교내외 그림 경시대회에 나가 입선도 많이 했다. 여고 땐 정규 수업이 끝나면 선재미술관에 가서 유명 작가의 작품을 보며 안목을 키웠다
이현주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는 결핵으로 학교에 거의 다니지 못했어요. 4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그리기가 재미있고, 또 쉬웠어요. 공부는 영 하기 싫었지만...”
마침 집안 사정도 괜찮았다. 부모님이 당시만 해도 큰 마트를 운영해 여유가 있었다. 교내외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입상도 했다.
“중학교 땐 미술 선생님께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팔레트와 붓을 선물해 줬어요”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각종 경시대회에 나가 여러 차례 입상도 했다.
“그때 ‘형산강문화제’에서 제가 특선을 했죠. 그 인연으로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에도 나갔어요”
그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출신이다. 안강은 경주시 북서쪽에 있는 읍으로 동방 오현(五賢)으로 꼽히는 회재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옥산서원과 국보 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이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남북 간 격전지 중 하나다.
형산강은 경주시 서면 도리, 인내산에서 발원해 포항시 남구 송도동을 거쳐 동해로 흐른다. 우리나라에서 동해로 흐르는 강 중 가장 긴 강이다. 안강읍은 바로 그 중간쯤에 있고, 형산강평야의 중심이기도 하다. 형산강문화제는 포항시 주최로 열린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예고에 입학하려고 나름 준비도 했다. “학원에도 열심히 다녔어요. 예고에 들어가려고 준비를 했죠. 그러다 막판에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인문계로 진학했죠”
안강여고(지금의 경주예일고)였다.
“여고에선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어요. 정규 수업이 끝나면 보충 수업은 안하고 보문단지 내 경주 힐튼호텔 앞에 있는 ‘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에 가서 작품 감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앤디 워홀(Andy Warhol), 백남준, 김창열 등 세계적 수준의 작가들 작품을 봤어요. 그게 아마 제 안목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봐요”
그는 서양화를 전공하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 같아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백화점 등에 디스플레이를 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스물네 살에 일찍 결혼했다
이현주는 대학에 입학했다. 서양화 전공이었다.
“대학 입학 후에도 학교엔 거의 나가지 않았어요”
기자가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자 “나에게 안맞는 옷 같았다”고 그가 대답했다. 그는 “철학도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다르듯이 그림도 동양화와 서양화는 다르죠. 저는 서양화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 그림이 아닌 다른 길로 나갔다.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에 디스플레이를 하는 일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어요. 15년 안팎 했던 것 같아요. 그땐 돈도 좀 벌고 했는데...그 일을 한 덕분에 요즘 작품 전시회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돼죠. 그림을 전시하는 것도 노하우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는 스물네 살에 결혼했다. 이른 나이였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결혼 후 그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지금 맏딸은 대구에 있는 번듯한 대기업에 다닌다. 혼자서 경주역 부근에 있는 새 아파트를 얻어 출퇴근하며 생활하고 있다. 중학생인 둘째 딸과 초등학생 아들은 고향 안강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린다고 별도로 떨어져 있는 화실에서 주로 지내다보니 살림살이는 친정 어머니가 도맡다시피 하고 있다.
㈜금오공업 김동식 대표를 만나 사옥 내벽에 벽화를 7년 간 그리게 됐다. 회사가 어려워져 폐업하면서 그림은 90%만 그린 채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후 그 그림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확인도 못했다
한동안 그림을 놓고 지냈던 그가 그림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남편과 함께 광고업을 할 때였어요. 알고 지내던 건축사 소개로 우연히 울산에 있는 ㈜금오공업 김동식 대표를 만났죠. 자동차 부품을 제조하는 회사였어요. 김 대표와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제가 그린 그림 사진을 몇 장 보여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저에게 제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서 ‘그림 한 점을 그려 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7년간 이어졌다. 처음엔 100호 작품을 그려서 드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김 대표의 마음이 바뀌었다. “이왕 그릴 거라면 우리 회사 사옥 내벽에다 아예 벽화를 그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사옥은 2층 건물이었다. 1층과 2층을 잇는 벽이 아주 크고 넓었다. 벽화를 그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김 대표가 ‘재료값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야 경리부에 얘기해서 결재를 해 줄 것 아니야’는 얘기였죠. 그러다 아예 그 회사의 직원으로 들어가서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정식으로 월급을 받아가면서 말이죠. 그렇게 7년 간 그림을 그렸어요. 물론 회사의 업무도 배우면서 말이죠. 그때 컴퓨터도 배우고 회사의 여러 업무도 조금씩 알게 됐어요”
그때가 2015~2021년이었다. 그림의 주제는 ‘금오에 축배를 들다’. 유화 아크릴 작품이었다.
“수입물감으로 재료비만 1억 원이 넘게 드는 대작이었어요. 태양을 아주 크게 그리고 그 주위에 행성 그리고 바다 등을 그렸어요. 그 바다는 하늘을 의미하죠”
회사에선 90평 규모의 연구실을 그의 작업실로 내줬다. 그만큼 그를 배려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완성하기까지 90% 정도 진척됐어요. 그런데 회사를 접어야 할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김 대표가 ‘벽을 잘라서 줄까’라고까지 했어요. 회사 사정이 어려운데도 저에게 끝까지 신경을 써 주신 김 대표와 사모님이 너무 고마웠어요”
그 사옥은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그 이후에는 아직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한번 갔다와야 할텐데...그림이 잘 있는지. 경주에서 울산까진 멀지도 않은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동국대 허만욱 교수로부터 4, 5년 간 사사받았다. 그땐 정말 열심히 했다. ‘천상의 작가’로 불러주고 ‘탄지’ 호를 지어진 분도 바로 그분이었다
그는 그 이후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에 들어갔다. 학부 과정에서 한국화를 담당했던 허만욱 교수가 정년 퇴임을 하고 대학원에서 선화(禪畵) 과정을 개설한 것이다.
그는 허 교수에게 4, 5년을 사사받았다. 그의 그림이 서양화와 한국화가 절묘하게 조화된 그림으로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땐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지금 그리는 그림의 토대가 그때 마련됐다고 봐야죠. 저를 ‘천상의 화가’라고 불러주신 분도 바로 허 교수님이죠”
천상의 화가?
“생각에 경계가 없다는 뜻이죠. 자유의 화신이라고 할까...허공에 띄운 그림, 붓으로 철없는 아이처럼 표현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주셨어요. 탄지(彈指)란 호(號)도 스승님이 지어주셨죠”
그의 화실은 경주 단석산 바로 밑에 있다. 옛 시골집을 임대해서 쓰고 있다. 아는 분의 소개로 왔는데 조용하고 너무 좋다. 그림을 그리기엔 더 이상 좋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의 화실은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20번 국도변에 있다. 옛 시골집을 임대한 것이다.
경주 남산(南山) 아래 있다가 최근에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집 앞엔 단석산(斷石山, 827m)이 우뚝 서 있고, 그 사이에 마을 이름을 딴 송선저수지가 길게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 저수지 물이 대천으로 흘러들었다가 황남동 부근에서 형산강으로 합류한다.
단석산은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는 데 “신라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이 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다.
이 산 중턱에는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유명한 마애불상군이 있다.
그는 “아는 분의 소개로 이곳으로 화실을 옮겨왔는데 조용하고 너무 좋아요. 그림을 그리기엔 더 이상 좋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그림에 노랑과 파랑, 빨강 등 원색을 자주 쓴다. 노랑은 광명, 즉 빛을 나타낸다. 밝고 영원히 살아 움직임을 상징한다. ‘노란 바람 속의 기도’ ‘태양의 꽃’ ‘비상하는 기억 그리고 황금의 날갯짓’ 같은 작품은 노랑이 기본이다
그의 작품에는 연꽃과 해바라기, 매화, 목련, 섬, 새, 바위, 바다가 자주 등장한다. 첨성대와 3층 석탑이 그려진 그림도 있다. 새를 형상화 한 듯한 작품도 있다.
그는 노랑과 파랑, 빨강 등 원색을 자주 쓴다.
“노랑은 광명, 즉 빛을 나타내죠. 밝고 영원히 살아 움직임을 상징하는 거죠”
그가 그린 ‘노란 바람 속의 기도’란 작품은 언뜻 보기에도 강렬하다. 노랑 바탕에 검정 연꽃잎과 줄기, 그리고 하얀 꽃잎이 대조를 이루며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노란빛은 세상에 내려 앉은 햇살이자 내면 깊숙이 깃든 생명의 울림이다. 그 위에 나는 흰꽃들로 순수함, 그리고 영원의 숨결을 담았다. 나는 꽃을 그리되 단순한 형태로 머물지 않고,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담고자 한다. 우리는 꽃과 같이 피어나고 스러지지만, 그 찰나의 존재가 남기는 흔적은 빛처럼 영원하다”
그가 이 작품에 남긴 작가노트다.
3층 석탑을 배경으로 해바라기를 그린 ‘태양의 꽃’은 더 파격적이다. 꽃은 본래대로 노랑이지만 줄기와 잎은 아예 붉다. 해바라기씨가 촘촘히 박혀 모여있는 중앙 부분은 갈색이 아닌 파랑으로 칠했다.
“먹 속에 피어난 해바라기 군락, 나는 그 안에 빛과 어둠, 침묵과 외침, 그리고 생명과 소멸의 경계를 담아내고자 했다. 금선(金線)을 사용했다. 금빛 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의지의 빛, 또는 무너진 경계 위로 되살아 나는 생명의 기운을 상징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형상이 사라질 때 그 본질은 더 깊이 드러난다. 보이지 않음이 곧 비어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노랑 바탕에 검정 삼족오(三足烏)를 닮은 형체 위로 수많은 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비상하는 기억 그리고 황금의 날갯짓’은 백과 흑의 대조, 백과 흑의 대결로도 비춰진다.
작가의 의도를 들어보자.
“노란빛의 공간은 따스한 햇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검은 형체는 과거의 기억, 혹은 잊히지 않는 상처의 잔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주위를 감싸며 날아오르는 새들은 자유를 향한 의지, 혹은 회복의 상징이다”
그의 얘기는 계속된다. “이 작품은 혼돈 속에서도 비상하려는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붓질을 거칠게 남기며 순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려 했다. 흩날리는 흰색의 새들은 단순한 생물의 형상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해방의 기운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청색은 다산 정약용의 청복(淸福)과 맞닿아 있다. 그의 작품에서 쓰인 청색은 사심이 없고 자연에 살고 싶은 꿈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열복(熱福)에는 관심이 없다. ‘바다이야기’는 바로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청색은 다산 정약용의 청복(淸福)과 맞닿아 있다. 다산은 청복과 열복(熱福)을 구분했다. 청복은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며, 마음의 평화와 자족을 누리는 내면적 행복을 의미한다. 반면 열복은 높은 지위와 부귀, 사회적 명예 등 외부적 성취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복을 뜻한다.
작가는 “제 작품의 산수와 바다 등에서 쓰인 청색은 사심이 없고 자연에 살고 싶은 꿈을 표현한 거죠. 저도 열복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라고 했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다이야기다.
‘바다이야기’는 검푸른 바위가 압권이다. 10여개의 크고 작은 바위가 저 멀리 수평선에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바다 위에 우뚝 서 있다. 앞쪽에 있는 바위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저마다 독특한 자세로 앉아 있거나 바위에 앉기 직전이다.
바위색이 워낙 강렬해 바다는 연푸르고, 태양은 하얗게 빛난다.
작가는 “푸른 바다는 언제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작품은 그 이야기의 한 순간을 담은 풍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달빛 혹은 아침빛이 수면 위에 내려앉을 때, 파도는 은빛으로 빛나며 바위와 대화를 나눈다. 바위 위의 작은 생명들은 그 속삭임을 들으며 또 하나의 하루를 맞이한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시간이 멈춘 듯한 생명의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짙은 푸른색은 바다의 깊이를, 희미한 흰빛은 그 위를 감싸는 빛과 바람을 표현한다. 붓질 하나하나에는 고요함 속의 움직임, 외로움 속의 온기를 담았다.
그는 “바다는 늘 말없이 흘러가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다시 살아가는 힘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그런 바다의 이야기를 내 마음은 언어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면 잡념이 없어진다. 그림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가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도 있다. 그림 외에는 특별히 다른 취미도 없다. 내 그림을 찾는 분들도 늘어났다. 그림을 사간 분들이 좋은 일이 생겼다고 더 구입하고 지원도 해준다. 전시회 할 기회도 많다. 그러니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최근 그림에만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림을 그리면 잡념이 없어져요. 오롯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가 있지요.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도 있고요. 저는 그림 외에는 특별히 다른 취미도 없어요”
서울에서 KTX 열차를 타고 취재차 경주역에 내린 기자와 점심 식사를 위해 자동차로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작가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어 보여줬다.
“그림을 얼마나 열심히 그렸는지 이 손 좀 보세요. 영 말이 아니죠”
새끼손가락이 활처럼 휘어 있고, 손가락 마디가 거칠게 매듭이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흡사 농사를 오래 지은 농부의 손과 닮아 보였다.
“최근에는 전시회를 할 기회도 많아졌고, 제 그림을 찾는 분들도 늘었어요. 그러니 그림을 열심히 그리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는 그동안 개인전 10여 차례, 단체전을 여러 번 했다. 서울, 부산, 제주, 경주 등 여러 곳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아트페어에도 참가했다.
“지난해 6월 서울신라호텔에서 ‘더 그랜드 아트페어’가 열렸는데 그때 제 그림을 구입하신 분이 많아요. 그분들이 그림을 구입한 이후에 좋은 일이 있었다면서 추가 구입도 해주고 많이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되고 있어요”
서울 인사동에 있는 덕원미술관 대표 이헌(98) 씨도 그의 고객이다. 그는 “그분은 고미술품 수집가로 이름난 분이신데 저에게 본인의 장수를 기원하는 매화 그림(30호)을 부탁해 그려드렸다”고 했다.
밴드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도 그의 그림 10여 점을 구입했다. “제 전시회에 와서 그림을 보고 여러 점을 사가셨어요. 그 후에도 몇 점을 더 구입했죠”
김창완은 음악으로 유명해졌지만 원래 그림을 그렸고 미술대학에 입학하려고 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 개인 전시회도 가진 작가이기도 하다.
이현주는 12월 4~7일 경주 하이코(경주화백컨벤션센터: Gyeongju Hwabaek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 HICO)에서 열리는 ‘HICO 2025 경주아트페어’에 참가한다.
내년 봄엔 미국 시애틀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미국 시애틀에 계시는 교포인데 서울 전시회 때 알게 됐어요. 그분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인데 그분의 주선으로 그곳에서 전시회를 기획 중이죠. 한번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그는 기자에게 말했다.
“제 소망은 평생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물론 유명 작가도 되고 싶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