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웅을 둘러싼 과거 소환의 방식이 도를 넘었다. 30년 전 청소년기 사건은 이미 법적 절차와 사법 판단을 통해 종결되었음에도, 일부 보도는 이를 오늘의 도덕적 범죄로 재해석하며 낙인을 반복한다. 이 수준이면 공익 제기라기보다, 과거를 트래픽 소비 대상으로 재포장하는 감정형 콘텐츠에 가깝다.
문제는 사실보다 프레임이 먼저 작동하는 구조다. 권력·고위 영역에 적용되는 신중함과 절차적 확인은 문화·연예 인물에겐 거의 부여되지 않는다. 정치·관료·재계 인사에 대해서는 “사실관계 확인 중”이라는 완충 문구가 작동하지만, 문화 인물에게는 의혹 제기 단계에서 이미 도덕적 파산이 선고된다. 공적 영향이 클수록 감시가 완화되고, 오히려 문화 영역일수록 단죄가 앞서는 역전적 구조다.
소년법은 교화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조진웅의 사건 역시 그 제도적 틀 안에서 종결됐다. 그 후 30년을 배우이자 시민으로 살아온 기록은 회복과 성장의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의 소환 방식은 한 장면으로 이 시간을 삭제하며, 우리가 공동체적 제도로 마련한 회복권의 효력을 스스로 무효화하고 있다.
조진웅은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예명 사용 역시 숨기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더 나은 존재로 남으려는 선택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 있는 태도는 균형적 판단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감정 동원형 소비 구조 속에서 재차 호출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고 이선균 사례를 통해 경험했다. 단번의 도덕적 단두대, 근거보다 감정이 앞선 폭격, 그리고 남겨진 회복 불가능한 상처. 그 실패 앞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조진웅 보도의 양상은 그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연예인은 공인이며 기준 적용은 필요하나, 다시 살아갈 권리 또한 공적 기준에 포함되어야 한다. 끝난 절차를 30년 후 현재형 단죄로 되돌려 소비하는 방식은 정의보다는 감정 재료화에 가깝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단죄가 아니라 기준의 일관성과 균형감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이제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적 권력에는 유예와 완충을, 개인·문화 인물에게는 단죄와 폭격을 적용하는 구조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공정성은 대상이 아니라 적용 기준의 동일성에서 출발한다.
소년사법은 회복 가능성을 승인한 제도이며, 조진웅은 그 절차를 이행했다. 그 이후의 30년을 삭제하고, 한 장면을 현재형 낙인으로 고정하는 순간, 우리는 회복권이라는 사회적 안전장치를 스스로 폐기하는 셈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선택해야 할 시선은 분명하다. 폭격이 아니라 절제, 단죄가 아니라 균형, 낙인이 아니라 회복이다.
문채형 뉴스룸 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