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강매화 기자 | 미국 주도의 ‘미국산 인공지능(AI)’ 생태계 구축 구상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선택을 둘러싼 논쟁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선 글로벌 AI 공급망 구조상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평가가 우세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기업이 미국 중심 질서에 종속돼 ‘하위 파트너’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동시에 제기된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를 포함한 AI 전 주기(풀스택)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해 동맹국에 수출하는 구상을 본격화하고 있다. AI를 전략 무기로 삼아 중국을 배제하고 기술 패권을 고착화하겠다는 계산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같은 구상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며, 동맹국 기업으로서의 역할과 기술 경쟁력을 전면에 내세웠다.
22일 미국 연방관보에 따르면 두 회사는 ‘미국산 AI 수출 프로그램’ 참여 의사를 공식 제출했다. 삼성전자는 의견서에서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 기업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밝혔고, SK하이닉스 역시 “AI 스택 전반에서 최고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동맹국 기업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향후 미국 기업들과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할 경우, 정책·재정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반도체 업계에선 이를 현실적인 선택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글로벌 D램 생산의 상당 부분을 한국 기업이 담당하고 있는 만큼, 미국 역시 한국 반도체 없이는 AI 전략을 완성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라는 확실한 수요처를 확보하고 기술 협력 기회를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참여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 중심의 AI 질서가 공고해질수록 한국 기업의 역할이 핵심 플레이어가 아닌 ‘공급자’에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의 AI 수출 프로그램을 두고 “기회이자 동시에 구조적 제약”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한국이 비교우위 품목에만 특화된 하위 파트너로 고착되지 않도록 국내 AI 생태계 전반의 균형 있는 발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시장 논리가 안보 논리를 전부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한 국내 AI 기업 관계자는 “AI 산업은 결국 성능과 가격이 지배하는 시장”이라며 “미국 기업들조차 중국 시장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현실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내부에서도 대중국 기술 차단을 둘러싼 이견이 존재한다.
결국 관건은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이후의 전략’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주도의 AI 생태계에 발을 담그되, 이에 종속되지 않기 위한 독자 기술과 생태계 구축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한국 반도체·AI 산업의 전략적 공간은 오히려 좁아질 수 있다는 경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