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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도전보다 꿈이라는 단어에 더 끌려요” 시대를 담는 디자이너 37세 이상봉의 꿈

국민 디자이너 이상봉. 처음 그가 패션의 중심 파리에 진출해 ‘대한민국’을 외치려 할 때, 모두가 그를 뜯어말렸다. 이제는 유럽에서 그의 스타일에 주목한다.

 

한글과 단청을 활용해 패션계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이후 그의 쇼는 점점 종합예술에 가까워져 갔다. 음악, 영상, 연극을 입체적으로 활용한다.

 

37년간 200회가 넘는 쇼를 만들어 온 그는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다’면서도 앞으로 해보고 싶은 다른 것들을 수없이 나열한다.

 

그가 오랫동안 강조해온 ‘도전’은 이상봉의 아이덴티티와도 같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도전보다 꿈이라는 단어에 더 끌린다. 영원히 37세에 머무르겠다는 디자이너답다.

 

취재 현소영/박준영 기자

 

“시니어 모델,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같이 했죠”
디자이너 이상봉은 사실 시니어 모델과의 인연이 깊다.

 

그는 2002년 자신의 첫 파리 컬렉션에 모델 출신의 60대를 모델로 기용했다. 광화문 무궁화 쇼 현장에 관람하러 왔던, 이제는 자타공인 톱 시니어 모델이 된, 김칠두를 즉석 캐스팅해 열흘 만에 자신의 무대에 데뷔시킨 것도 그다.

 

일반인의 사연을 받아 메이크오버 해주는 방송 코너도 오래 맡았다. 그러나 그가 일반인 시니어 모델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된 건 조금 더 지나서였다.

 

“이제 한 6년 된 것 같네요. 한 백화점에서 고객을 모델로 한 쇼를 만들었어요. 시니어 모델들의 가족들이 응원차 모였고요. 이분들이 정말 뿌듯해하고 기분 좋아했겠죠. 그런데 그들이 감동했던 건 가족들이 자기를 ‘인정’해줬다는 거였어요. 특히 어린 손자, 손녀들이 ‘우리 할머니 멋지다!’고 물개박수를 치니까(웃음).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그랬겠어요.”

 

"이곳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제 앞, 옆, 뒤를 한 번에 볼 수 있어요." 그는 이런 생각을 좋아한다. 자신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며, 중의적인 현상들을 좋아한다. 

▲ "이곳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제 앞, 옆, 뒤를 한 번에 볼 수 있어요." 그는 이런 생각을 좋아한다. 자신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며, 중의적인 현상들을 좋아한다. 


“시니어 모델의 진짜 가치는 가족의 인정”
특히 가정에서 그저 엄마, 집사람, 할머니로만 살던 여성들이 한 사람의 모델로서 당당히 런웨이를 가르고, 가족들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모습에서 시니어 모델이 단지 ‘걷는 모델’로서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정신적 가치를 가진 문화라는 걸 알게 됐다. 이상봉이 시니어 모델의 진짜 가치를 발견한 때다.


“저는 좀 더 많은 분이 이 시니어 모델 과정을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모델에 꿈이 없는 분이라도요. 바르게 걷는 법만 배워놓아도 일상에 도움이 돼요. 내가 뭔가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다는 걸 자기가 먼저 알거든요. 그러다 우연히 무대에서게 된다면 더 좋고요. 그런 행복도 느껴봤으면 좋겠고. 자식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가족을 위해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잃고 살아요. 그런데 잃어버렸던 나를 되찾으면 오히려 내 가족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게 됩니다. 이게 가장 획기적인 효과 같아요. 무대에 서고 안 서고는 나중 문제죠.”

 

매장은 마치 런웨이를 연상시켰다. 자기도 모르게 모델처럼 캣 워킹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 매장은 마치 런웨이를 연상시켰다. 자기도 모르게 모델처럼 캣 워킹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꼭 하나 찾으세요”
그는 이어 한 부부 얘기를 꺼냈다.

 

미대 입시 학원에서 만나 연애하고 결혼에 골인해 정년 즈음까지 함께해 온 부부다. 화가가 꿈이었던 남편을 뒷바라지하려고 아내는 미술 교사가 됐다.

 

세월이 지나 남편은 화가로서 성공했다. 건물을 살 정도였으니 화가로서 고군분투한 남편과 이를 내조한 아내의 행복이 그려진다.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았더랬습니다’로 끝마치면 좋았을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과정에서 아내가 지쳐버린 거예요. 아내도 실은 화가가 꿈이었지 교사는 아니었으니까요. 남편을 위해 희생했던 거죠.”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이 희생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빨리 아내가 하고 싶은 일 하나를 꼭 찾으라고 조언했어요. 아내가 친정엄마를 따라 노래방에 간다기에 그림이 아니라도 좋다. 노래 교습을 받든, 노래방을 더 자주 가든 관심을 기울일 것 한 가지는 꼭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했었죠.”


얼마 뒤 이상봉의 조언을 따랐던 부부 사이가 다시 회복됐다고, 너무 좋아졌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었다. 이상봉은 탁구 마니아다. 강동구 명예 탁구협회장도 맡을 정도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어떤 것이든 한 가지는 운동을 하라고 권한다. 운동 자체의 효과도 좋지만, 운동을 같이할 친구를 만드는 기회로 삼으라는 조언이다.

 

책 커버를 씌웠을 땐 The Truth of Lie, 거짓의 진실로 보이던 글귀가 커버를 벗기자 The Truth of Lie Sang Bong, 이상봉의 진실이 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법이다. 

▲ 책 커버를 씌웠을 땐 The Truth of Lie, 거짓의 진실로 보이던 글귀가 커버를 벗기자 The Truth of Lie Sang Bong, 이상봉의 진실이 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법이다. 


“고립에 익숙해지면 지는 것”
이상봉은 코로나 시대에 시니어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으로 ‘고립에 익숙해지는 것’을 꼽았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한 소통의 부재와 관계 단절을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본다.


“최근 일어나는 범죄 사건들 보면 그 잔혹성이 말도 못 하게 심해졌어요. 저는 이게 코로나19 효과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얼마 전에 이틀 정도 집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봤어요. 조금 지나니까 슬슬 어디 나가고, 약속 잡는 게 싫어지더라니까요. 내가 게을러지는 데에 익숙해진다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젊은 애들은 그냥 ‘될 대로 돼라’는 식의 객기라도 있고, 안 되면 차선책이라도 찾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방역 수칙을 지키고 조심할 건 하되 모든 걸 차단하지는 말자는 거예요. 암에 걸리면 내가 암과 싸운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내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암을 내 친구처럼 여기면서 마지막 사는 날까지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코로나도 그래요. 친구가 되고,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상봉의 매장 곳곳은 돌과 나무가 보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데 그가 한 핸드백을 가리키며 "들어볼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들면 주실 건가요?" 했다. 그는 그냥 웃었다. 그 백은 오로지 돌덩어리로만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 이상봉의 매장 곳곳은 돌과 나무가 보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데 그가 한 핸드백을 가리키며 "들어볼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들면 주실 건가요?" 했다. 그는 그냥 웃었다. 그 백은 오로지 돌덩어리로만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그때부터 나이를 먹지 않았다”
이상봉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37세로 소개해왔다. 자신은 영원한 37세로 남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에게 37세는 자신이 가장 빛났던 소위 ‘리즈 시절’이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올해도 저는 37세고요(웃음). 37세는 스스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예요. 세상에 천재는 많고, 나는 자꾸만 뒤처지는 것 같았어요.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고 느낀 게 서른일곱 살이었어요. 천재들을 뒤쫓아 가기에만 급급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나는 나다.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나를 사랑하자. 나에게 충실히 살자. 그렇게 마음먹었죠. 그때부터는 남에 대한 미움이나 질투가 조금씩 없어졌어요.”
인생을 살수록 현재나 미래보다 왕년의 추억을 꺼내는 게 편하고 익숙해진다. 과거의 빛나던 시절을 떠올리는 건 팍팍한 현재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자칫 달콤한 과거에 머무르다 잠식당하기도 한다. 이상봉은 반대다.

 

한글 디자인으로 파리를 놀라게 한 이상봉의 아이덴티티가 적용된 카우치

▲ 한글 디자인으로 파리를 놀라게 한 이상봉의 아이덴티티가 적용된 카우치


“시니어로서는 은퇴 후를 준비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껴요. 은퇴라는 게 실감 나지도 않고, 안 올 것만 같은데 어느 순간에 분명 올 거잖아요. 주변에서도 각종 분야에 도전하며 제2의 인생을 사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져요. 저는 ‘도전’을 내 일, 패션에서만 해왔고요. ‘은퇴’라는 것도 막연히 부정만 할 게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해요. 저도 노력하고 있고요.”

 

 

“연극의 꿈, 한 번은 꼭 공연할 거예요”
이상봉은 패션계에 입문하기 전에 연극배우를 꿈꿨다. 공연을 일주일 남겨두고 도망쳤다. 디자이너로서 쇼에 연극을 입히는 시도도 그래서였을까.


“해보고 싶었던 것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도전해왔어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하라’는 말이 스스로나 직원들에게, 도전을 얘기할 때 꼭 하는 말이에요. 연극도 그렇습니다. 은퇴하면 한 번은 꼭 공연을 만들 생각이에요. 소극장을 빌려서 한 달 동안 공연을 하는데 하루에 소중한 사람 30명 정도 초대를 해서 그 사람과의 인연을 소재로 10분 정도씩 대화하거나, 추억하는 내용으로 하고 싶어요.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간의 인연들을 돌아보는 시간도 되겠죠.”

 

 


 

“지금은 꿈이라는 단어를 제일 좋아해요”
코로나19가 정말 밉지만, 그간 못 가보던 국내 여행의 계기도 됐다. 최근 가장 자주 가는 곳은 남해와 하동이다. 그는 트로트 가수 정동원과 함께 하동 홍보대사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데가 많지만, 남해는 정말 천혜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이에요. 지인이 운영하던 리조트를 경영난으로 내놓게 됐는데 여기를 한 칸 사서 더 자주 가죠. 가보면 일반인도 있고 아티스트도 있는데 거기서 밤에는 술 한 잔 나누면서 인생 얘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다 보면 이 안에서 또 뭔가 새로운 꿈이 이뤄질 수도 있겠죠. 꿈을 만들기 때문일까요. 하루만 다녀와도 힐링되는 기분이 많이 들죠. 예전에는 사랑, 열정, 도전같은 단어를 좋아했다면 지금은 꿈이라는 단어에 가장 끌려요.”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다보니 사상가 같은 면모를 보게 됐다. 그의 꿈은 더 먼 곳에 있었다. 패션은 어쩌면 도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다보니 사상가 같은 면모를 보게 됐다. 그의 꿈은 더 먼 곳에 있었다. 패션은 어쩌면 도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북아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어요”
한글을 담는 디자인으로 국민 디자이너 반열에 오른 디자이너 이상봉. 2022년 그의 꿈은 한글로 받은 사랑을 한국에 돌려주는 일이다.


“제 꿈의 중심은 늘 파리라고 생각했어요. 유럽이라는 거대한 패션계는 여전히 공고하고요. 우리 아시아가 이런 문화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그러려면 먼저 한·중·일이 뭉쳐야 하는데 세 나라는 각각 상처가 있어요. 어려운 문제죠. 대신 이걸 극복만 할 수 있다면 동북아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문화적으로는 벌써 그런 움직임이 있고, 정치·경제적으로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생애 첫 패션쇼 참가 이틀 전 코로나 확진으로 패션쇼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중학생의 사연을 들은 이상봉의 응원메시지

▲ 생애 첫 패션쇼 참가 이틀 전 코로나 확진으로 패션쇼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중학생의 사연을 들은 이상봉의 응원메시지


“도전하는 이들 응원하며 연말 보낼 거예요”
“말일에는 백신을 맞을 계획이에요. 그나마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은 날이기도 해서(웃음).”
2021년 마지막 날과 2022년 첫날의 계획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1월 1일에는 지인의 뮤지컬 공연을 볼 예정이다. 자신의 내면을 찾기 위한 꿈을 꾸는 지인이란다. 그의 표정에서 기대감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인터뷰를 진행한 12월 20일. 2021년의 남은 열흘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게 이날 만난 디자이너 이상봉의 숙제였다. 국민 디자이너의 연말은 공식 행사로 바쁘고,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축배와 함께 새해를 맞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소박하다.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가수로 전업한 지인의 공연에 깜짝 방문해볼까도 싶고요. 그의 유튜브에 출연해볼까? 하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깊은 사연은 모르지만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지인을 응원하면서 연말을 보내는 것만큼 의미 있는 게 또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