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산업
[재개발 브로커 주의보 ④] 약정서엔 ‘무상’, 녹취엔 ‘5억짜리 CM’…엇갈린 문서와 발언
지이코노미 문채형 기자 | 정비사업에서 ‘자문’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사업성 검토나 정책적 조언에 그친다면 말 그대로 자문이다. 그러나 용역계약과 업체 선정처럼 조합의 돈이 직접 움직이는 영역까지 관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천억 원대 사업비가 투입되는 재개발 사업에서 특정 인물이 어떤 자격으로 조합에 접근하고, 계약과 업체 선정 과정에 어디까지 관여하는지는 조합원의 재산권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본지가 확보한 문건과 녹취, 현장 취재를 종합하면 특정 재개발 사업장에서 ‘무상 자문역’으로 활동한 이모 씨의 실제 역할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된다. 약정서에는 대가를 받지 않는 ‘무상’이 명시돼 있지만 업무범위에는 용역계약 검토와 신규 업체 선정이 포함돼 있었다. 또 다른 재개발 사업장을 설명하는 이씨의 육성 녹취에서는 “5억짜리 CM”과 “조합 돈”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수개월 뒤 이씨는 실제 방범용역업체 대표와 함께 약정서를 체결한 조합 현장에 나타났고, 이후에는 해당 업체 대표와 조합장의 별도 만남까지 연결했다. 각각의 사실만으로 위법성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서에 적힌 ‘무상 자문’과 녹취에서 드러난 계약·자금에 대한 발언, 실제 현장에서 이어진 행적 사이의 간극은 이씨의 실질적인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되묻게 한다. ◇ 약정서엔 ‘무상’…그런데 업체 선정까지 왜 필요했나 본지가 확보한 2025년 8월 자 ‘정비사업 기술지원(CM) 약정서’에 따르면 이씨에게 부여된 업무범위는 통상적인 조언 수준을 넘어 상당히 폭넓다. 약정서에는 사업시행계획 및 관리처분계획 검토, 사업성 분석뿐 아니라 각종 용역계약 검토, 신규 업체 선정 가이드라인 수립, 시공사 도급계약 분석, 협력업체 및 하도급 업무 자문 등이 포함돼 있다. 정비사업 추진 과정에서 사업비와 업체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핵심 영역들이다. 반면 용역 대가는 ‘무상’으로 명시됐다.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무상’이라는 표현보다 그에게 부여된 업무의 범위다. 특히 신규 업체 선정과 각종 용역계약 검토는 조합 자금의 지출과 직결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다는 자문역에게 왜 신규 업체 선정과 용역계약 검토라는 역할까지 필요했을까. ‘무상’은 단지 조합으로부터 직접적인 자문료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업체 선정 과정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동일하지는 않다. 결국 약정서에 적힌 ‘무상’이라는 한 단어만으로 이씨가 정비사업에서 수행하려 했던 실제 역할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다른 사업장 녹취엔 “5억짜리 CM…조합 돈 빼내야” 이 같은 의문은 본지가 확보한 이씨의 별도 육성 녹취를 통해 한층 구체화된다. 해당 녹취는 전문 속기사무소의 번문을 거친 것으로 이씨와 취재진 간 통화 내용이다. 다만 녹취에서 이씨가 설명하는 재개발 조합과 앞서 ‘정비사업 기술지원(CM) 약정서’를 체결한 조합은 서로 다른 사업장이다. 따라서 두 사업장의 계약이나 자금 흐름을 동일한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녹취는 이씨가 다른 정비사업 현장에서 CM과 용역계약, 조합 자금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씨는 당시 자금난을 겪고 있는 다른 조합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선은 조합 돈”을 활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어 예산 편성, 용역비 변경 신고, 대여 형식 등을 거론하며 자금 조달 방안을 설명하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5억짜리 계약을 하나 써서 우선 그걸 CM으로 해가지고 빼내야 된다.” 이어 CM 또는 용역업체를 통한 하도급 계약 체결과 자금 회수 방식, 조합장의 대여 형식 결제 등 구체적인 계약 형태와 자금 흐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빼내야’라는 표현 자체의 법률적 의미를 이 녹취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 해당 방식으로 조합 자금이 집행됐는지 역시 별도의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다. 다만 이씨가 CM과 용역계약을 조합 자금을 조달하거나 집행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앞서 작성된 ‘무상 자문’ 약정서의 업무범위가 다시 주목된다. 한 사업장에서는 대가 없는 자문역으로 용역계약과 신규 업체 선정에 관여하는 약정을 맺고, 다른 사업장을 설명하면서는 ‘5억짜리 CM 계약’과 ‘조합 돈’을 연결해 설명했기 때문이다. ◇ 수개월 뒤 방범용역업체 회장과 현장 등장 문서와 녹취에서 발견된 간극은 이후 실제 현장 행적에서도 이어졌다. 약정서 작성 수개월 뒤 이씨는 해당 재개발 조합 현장에 방범용역업체 배모 회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조합 관계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현장을 둘러보면서 향후 철거 과정에서 사용할 공간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며, 당시 조합이 아직 결정하지 않은 사안까지 먼저 언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배 회장은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현장 방문 이유에 대해 “과거 사용했던 범죄예방 사무실을 조합에 인수인계하고 비밀번호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해명했다. 이씨와 배 회장이 함께 현장을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특정 업체 선정이나 이권 개입을 단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후 두 사람의 관계와 이씨의 역할을 둘러싼 추가 정황이다. ◇ 3억원 미수금 해결에 왜 ‘무상 자문역’이 등장했나 해당 방범용역업체는 과거 이 조합에서 수행한 용역과 관련해 약 3억 원 규모의 미수 채권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상적인 채권이라면 계약서와 범죄예방 업무일지 등 실제 용역 수행을 입증할 자료를 토대로 조합에 대금을 청구하고, 조합이 이를 검토한 뒤 지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다. 그러나 올해 5월 이씨는 현 조합장에게 연락해 조합 사무실이 아닌 경기도 구리시 소재 한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조합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배 회장도 자리에 함께 있었다. 조합 관계자에 따르면 미수금 문제가 거론되자 이씨는 “계약된 것은 당연히 받을 수 있고, 명확하지 않더라도 실제 업무를 했다면 받을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며 배 회장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이어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조합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일한다는 자문역이 왜 조합에 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용역업체 대표와 조합장의 만남을 주선했을까. 더구나 이씨의 약정서상 업무범위에는 바로 ‘용역계약 검토’와 ‘신규 업체 선정 가이드라인 수립’이 포함돼 있었다. ◇ “일절 관여 없다”던 배 회장…“도움 기대했다” 배 회장의 설명도 취재 과정에서 달라졌다. 배 회장은 초기 취재 당시 이씨와의 관계에 대해 “일절 관여된 바 없다”는 취지로 선을 그었다. 그러나 취재진이 구리 카페 모임의 성격과 참석 경위를 재차 확인하자 이씨가 조합장과 친분이 있다고 해 함께 자리를 만들었으며 미수금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기대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이 대목은 이씨에게 실제로 조합의 의사결정을 좌우할 권한이 있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적어도 용역업체 대표인 배 회장에게 이씨가 ‘조합장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 나아가 자신의 미수금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로 인식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합 측 문서에서는 ‘무상 자문역’이었던 이씨가 용역업체 측에서는 조합장과의 친분을 활용해 대금 문제 해결을 도울 수 있는 중재자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 과거 금전거래 진술과 법정 증언 배치…경찰, 위증 혐의 송치 취재진이 이씨의 정비사업 관련 언행과 계약 구조를 면밀히 추적하게 된 배경에는 과거 금전 문제와 관련한 그의 사법 리스크도 있다. 본지가 확보한 경기하남경찰서 수사결과 통지서 및 송치결정서에 따르면 경찰은 이씨를 위증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씨는 지난해 10월 서울북부지방법원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과거 사건 관계자와의 금전 거래 여부를 묻는 질문에 “없다”고 증언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이씨가 2021년 서울동대문경찰서 참고인 조사 당시 “특정 업체로부터 3억 원을 빌린 사실이 있고 법인 회계장부에도 기록돼 있다”는 취지로 진술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은 과거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과 이후 법정 증언이 서로 배치된다고 판단해 위증 혐의를 적용하고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다만 경찰의 송치 결정은 이씨의 위증 혐의가 형사적으로 확정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향후 검찰 수사와 사법절차에 따라 최종 판단이 내려질 사안이다. 또 과거 사건에서 등장하는 3억 원과 이번 방범용역업체가 주장하는 미수금 약 3억 원은 당사자와 발생 경위, 자금 성격이 전혀 다른 별개의 사안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경찰이 과거 금전거래를 둘러싼 이씨의 수사기관 진술과 법정 증언이 서로 배치된다고 판단해 위증 혐의로 송치했다는 사실은 그의 정비사업 관련 발언과 금전관계를 검증해야 할 필요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 약정서는 ‘무상’이었다…그렇다면 실제 역할은 무엇이었나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다시 놓고 보면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약정서상 이씨의 자문 대가는 ‘무상’이었다. 그러나 업무범위에는 조합의 돈이 움직일 수 있는 용역계약 검토와 신규 업체 선정이 포함돼 있었다. 다른 재개발 사업장을 설명하는 녹취에서는 “우선은 조합 돈”, “5억짜리 계약”, “CM으로 해가지고 빼내야 된다”는 발언이 등장했다. 그리고 수개월 뒤 이씨는 실제 방범용역업체 대표와 함께 약정서를 체결한 조합 현장에 나타났다. 이후에는 약 3억 원의 미수금을 주장하는 해당 업체 대표와 조합장의 별도 만남까지 연결했다. 업체 대표는 취재진에게 이씨가 조합장과 친분이 있다고 해 자리가 만들어졌으며 미수금 해결 과정에서 도움을 기대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각각의 사실만으로 불법적인 이권 개입이나 부당한 자금 집행을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 업체 선정이나 자금 집행이 이씨의 개입으로 이뤄졌는지 역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서와 발언, 현장 행적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어진다면 질문은 달라진다. 조합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일한다는 ‘무상 자문’의 실제 범위는 어디까지였는가. 단순한 조언자였는지, 조합과 업체 사이의 중재자였는지, 아니면 업체 선정과 계약·자금 구조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검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히 이씨가 다른 사업장을 설명하면서 직접 언급한 ‘5억짜리 CM’이라는 숫자는 취재 과정에서 또 다른 5억 원의 실체와 맞닥뜨린다. 본지는 다음 편에서 이씨를 둘러싸고 실제로 움직인 5억 원의 자금이 어디에서 시작됐고, 누구에게 전달됐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설명이 오갔는지를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