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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스윙을 구사한 비운의 천재
모 노먼 Moe Norman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도 잘 모르는 천재적인 골프선수가 있다. 바로 모 노먼(1929~2004). 전설 속으로 사라진 모 노먼은 골프 역사가들과 선수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천재 골퍼로 불린다. 벤 호건만큼 공을 잘 친다고 인정받은 모 노먼. 그는 어째서 무명으로 살았을까. 가슴 아픈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글 박진권 기자 참고 자료 박노승 <더 멀리, 더 가까이>
타이거 우즈는 골프 역사상 자기만의 스윙을 가졌던 선수는 두 명뿐이라고 말한다. 한 명은 벤 호건이고, 다른 한 명은 모 노먼이다. 우즈는 자신도 그런 스윙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타이거 우즈의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모 노먼의 인지도는 급격히 상승했다. 모는 위대한 선수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볼 스트라이커로 인정받는다. 자폐증을 앓고 있었던 모 노먼이 위대한 선수가 되기는 너무도 힘들었다. 세월이 흘러 칭송받는 골프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5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바로 롱 게임, 쇼트 게임, 멘탈, 매니지먼트, 사회성이다. 하지만 모 노먼은 오직 롱 게임에서만 최고수였다.
완벽한 스윙을 가진 골프계의 이단아
모 노먼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골퍼로 인정받았지만, 골프계의 이단아 또는 골프장의 광대로 취급받았다. 그는 영웅, 샘 스니드와 시범 경기를 했다. 비교적 짧은 파 4홀이었지만 240야드 지점에 개울이 가로질러서 흐르고 있었다. 개울을 넘기려면 255야드 정도를 날아서 가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공과 클럽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고의 장타자로 인정받는 샘 스니드는 이미 개울보다 짧게 쳐 놓았는데, 모가 드라이버를 가지고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왔다. 샘 스니드가 고개를 저으며 드라이버로는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충고했다. 모는 아무런 말 없이 페어웨이 가운데 있는 다리를 가리켰다. 그의 티샷은 다리 앞에 떨어지더니 다리 위를 굴러서 개울을 넘어갔다. 모 노먼의 생애에 홀인원 17회, 앨버트로스 9회 18홀 59타 3회, 61타 4회, 코스레코드 33회를 기록했다. 그의 스윙을 본 유명 프로골퍼들은 노먼의 스윙은 현재도 최고이고 100년 후에도 최고라고 입을 모아 찬양했다.
혜성처럼 나타나 우승을 남기고 사라지다
모 노먼은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아마추어 시합에 참여해 우승한다. 캐나다의 골프계에 그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무협 소설의 주인공이 산속에서 혼자 단련하며 하산한 뒤에 당대 최고수를 연파하는 장면을 연상 시킨다. 그는 온타리오주의 토마스 골프 클럽이 주최한 제1회 대회에 참가한다. 온타리오주의 아마추어 챔피언들과 미국의 유명 아마추어 고수들이 대거 초대되었다. 그는 무명이라 초대받지 못했다. 시합 당일에 참가할 수 있도록 준비된 몇 명의 자리를 목표로 무작정 참석해 기회를 얻은 것 이었다. 복장부터 눈에 띄게 가난한 행색에 구멍 뚫린 골프백을 메고 나타난 모 노먼을 의식하는 선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승 후보를 연달아 깨부수고 우승을 차지한다. 생애 처음으로 개인전 시합에서 우승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노먼은 사라졌다.
우승자가 트로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우승 소감을 이야기하던 관례가 무참히 깨진 것이다. 몇 주 후 웨스트 마운트 골프 클럽에서 열린 대회에 나타난 노먼은 또다시 승을 챙겨 유유히 사라졌다. 노먼은 23세가 될 무렵까지 아마추어 시합들에서 우승을 반복했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스윙의 골퍼, 골프계에서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선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노먼은 우승을 반복하며 우승 상품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우승 상품은 TV였다. 일 년에 10대 가까이 TV를 챙겨왔으니 가난했던 그가 상품을 파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상품 리스트 중에서 2등 상품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땐 일부러 2등으로 라운드를 마치기도 했다.
원동력을 잃은 모 노먼
1967년에 상금 16000불과 최저 평균 타수 상을 받은 노먼은 1968년에도 비슷한 상금을 받고 다섯 번째 최저 평균 타수 상을 받으며 재정적인 안정을 찾았다. 1971년 2명의 캐나다 대표 팀에 선수로 뽑혀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월드컵 골프대회에 참가했다. 아쉽게도 성적은 8위에 그치고 만다. 대회가 끝나고 노먼은 레인지에서 공을 치고 있는데, 남아공의 게리 플레이어가 노먼에게 다가와서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잠시 후에 잭 니클라우스와 리 트레비노까지 모였다. 이들의 전적을 합치면 메이저 17승의 선수들이 노먼 앞에 모인 것이다. 이유는 바로 노먼의 깔끔한 스윙 때문이었다. 노먼의 어떤 경계심도 없이 질문에 답하며 시범을 보였다. 그들은 4시간 동안 함께 레인지에 머물렀다. 어느 시합에서든 노먼이 레인지에서 연습 공을 치고 있으면 타이거 우즈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선수가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존경을 표시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대 노먼은 프로골프 시합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저축했던 돈도 거의 소진하게 됐다.
만일 노먼에게 정신적인 장애가 없었더라면,
가족들이 그를 잘 후원했더라면,
든든한 스폰서가 있었더라면,
다른 선수들이 그에게 좀 더 친절했더라면,
퍼팅을 좀 더 잘했더라면,
모 노먼은 위대한 골퍼가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