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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토리] 국내 43승, ‘살아있는 전설’ 최상호

최상호는 1955년 1월 4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고양시 원당에 뉴코리아 골프 클럽이 생겼다.

그곳에서 골프 볼을 팔거나 줍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일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이후 본격적으로 골프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1966년 11월 말, 그때만 해도 국내 골프장이라고는 5개밖에 없었다.

 


박진권 기자 참고 자료 한국프로골프 40년사

 

끈기와 열정이 만들어 낸 끝없는 우승 행진
최상호는 뉴코리아 골프 클럽의 손흥수 헤드 프로, 그 밑으로 손창열, 신세호 프로에게 골프를 배웠다. 그들의 조언을 듣고 어깨 너머로 스윙을 익혔다. 당시 골프 잡지에는 게리 플레이어나 벤 호건 같은 톱 프로 스윙이 소개됐다. 반면 손창열, 신세호 두 사람은 키가 크지 않음에도 최고의 기량을 가졌기 때문에 특히 주목해서 연구했다.


그가 골프를 시작하고 바로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다. 19세에 골프에 입문해서 24세 77년 9월 30일 프로 테스트에 합격했다. 7번 만에 힘겹게 합격했다. 중간에 포기할 법도 하지만 그는 ‘이것에 내 길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데뷔한 이듬해에 여주오픈에서 첫 승을 올렸다. 그것도 당시 최정상인 한장상을 꺾고서 얻어낸 기록이었다. 여주오픈은 당시 총상금 1000만원의 빅 이벤트로 일본 프로 20명 등 총 140명이 출전했다. 그는 첫날 20위권으로 주춤하는 듯했으나, 결국 5번 홀부터 선두로 나섰다. 10번 11번 홀에서 다시 스코어를 줄여 67타를 기록하며 3타 차 우승을 차지한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첫날 74타로 20위권이었고 2일째는 71타를 쳐서 12위로 올랐습니다. 3일째는 66타로 코스 레코드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 보니 한장상 프로는 208타로 3타 차 선두였고 저는 2위, 그리고 2타 차로 당시 전성기의 김승학 프로가 3위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첫 번째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을 때의 중압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 스윙이 제대로 안 됐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았습니다. 첫 홀부터 제가 버디를 잡고 한 프로님이 파를 잡아 기세 좋게 나갔습니다.”

 

 

그의 성공 비결은 팔이 길어질 정도로 쇠막대기를 휘둘렀던 끈기다. 그리고 자신에 맞는 스윙 폼을 개발한 창의성과 밤새도록 방안에서 퍼팅 연습하고 퍼터를 끌어안고 잠을 이룬 열정이다. 마지막으로 끈기, 창의성, 열정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한 자신감과 집중력이다.


당시 퍼팅만 놓고 보면 그를 따라올 선수가 없었다. 그는 밤새 방안에서 퍼팅 연습을 하느라 부인이 신경증에 걸릴 정도였다. 같은 퍼터 3개를 골프백과 자동차 그리고 집에 각각 보관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같은 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어드레스때 몸을 너무 숙이고 팔을 늘어뜨린 자세는 아마추어들이 흉내 내서는 안되는 자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체 조건에 가장 최적화된 스윙을 했다. 뉴코리아 골프 클럽 헤드 프로를 지냈던 손흥수 프로는 이렇게 말했다. “최상호는 백스윙과 다운스윙에서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어깨가 회전됩니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큰 아크를 그리며 스윙합니다. 그의 스윙은 한국에서 최고입니다.”

 

1980년부터 시작된 최상호의 우승 행진은 96년까지 이어졌다. 그는 이 기간에 1988년을 제외하고 매년 1승 이상을 올렸다. 1985년과 1986년 그리고 1991년과 1992년에는 각각 시즌 4승을 올리면서 독주 체제를 구축한다. 한장상과 김승학의 배턴을 이어받아 한국 프로 골퍼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81년은 그의 이름을 확고히 알린 해였다. 한 해 동안 우승 2회, 2위 2회, 3위와 4위 각각 1회 등 참가한 대회마다 상위 5위안에 들었다. 그해 MVP, 상금 1위, 최저타까지 기록해 3관왕을 달성했다. 그때 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국내보다는 아시아서키트나 해외 투어에 더 많이 참여했고, 한 해에만 25개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1985년은 4승을 올리면서 한 시즌 개인 최다 우승 성적을 적어냈다. 이듬해 1986년에는 쾌남오픈에서 우승하며 한장상이 가지고 있던 국내 최다승과 타이가 된다. 얼마 후 KPGA 선수권에서 정상에 오르면서 국내 최다승을 기록한다. 그해 팬텀부산오픈에서도 우승하며 시즌 4승과 국내 21승 고지에 오르게 된다.


미국 진출의 후유증 때문에 1988년에는 우승하지 못한다. 그러나 1989년부터 다시 승수 쌓기에 나서며 1991년과 1992년에 각각 4승씩 거두며 1990년대에도 간판스타의 위치를 내주지 않았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18승을 쓸어 담으며 연평균 2.2회 우승을 기록한다.


1996년에는 경주조선에서 열린 영남오픈 2라운드에서 18홀 국내 최소타 기록을 세운다. 10언더파 62타였다. 한국프로골프에서는 최소타 기록이었다. 보기 없이 버디 10개를 잡은 10언더파였다. 이후 2005년 백암비스타에서 열렸던 KPGA 선수권 1라운드에서도 62타를 쳤다.


내셔널 타이틀인 한국오픈에서는 단 1승에 그쳤다. 또한 해외 대회에서는 우승이 없다. 1983년부터 1996년까지 싱가포르와 인도 그리고 홍콩과 대만, 필리핀 등 총 12개 대회 모두 상위 10위에 속했음에도 우승이 없다. 5번은 상위 5위였고, 한 번은 2위로 아쉽게 마무리했기 때문에 우승 운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홈 코스에서 우승이 없기는 남서울 C. C.로 옮긴 후에도마찬가지였다. 2005년 남서울 C.C.에서 열렸던 매경오픈에서의 우승은 징크스를 깬 사례다. 시니어 프로 자격을 앞둔 그의 집념과 프로 정신의 우승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라운드에서 버디 9개로 66타 선두에 나서 4일간 선두를 내주지 않고 우승했다. 마지막 날 17번 홀 그린에서 10m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우승을 확정했고 그해 상금 순위 3위에 올랐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첫날부터 샷 감각이 좋았습니다. 또 대회장이던 남서울 C.C.에서 91년부터 헤드 프로로 일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코스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대회장을 찾은 갤러리들 모두 제 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만의 느낌이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가 4강 신화를 이룬 상황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응원의 신바람을 타고 대회 내내 잘 쳤습니다. 제게 운이 따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우승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주어진 한계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의 프로 근성은 30년 프로 생활 중에 아프거나 성적이 나빠서 중간에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또 ‘역전의 명수’. ‘4라운드의 사나이’라는 별명은 그의 이런 프로 근성에서 따라온 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