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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투어를 개척한 한국의 자존심 임진한

| PEOPLE & STORY |

 

일본 투어를 개척한

한국의 자존심

임 진 한

 

임진한은 1977년 함께 프로 테스트를 통과한 최윤수, 최상호보다 첫 승이 늦었다. 그러나 그 첫 승이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였다는 점에서는 준수한 결과였다. 1983년 9월 대구골프장에서 열렸던 제26회 한국 프로골프선수권에서 4라운드 합계 이븐파 288타로 정상에 오른다. 김영일과 김승학을 1타 차로 밀어낸 짜릿한 첫 승이었다.

 


박진권 기자 참고 자료 한국프로골프 40년사

 

종횡무진 활약한 임진한,
그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1승 후 그는 이듬해 한인 골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제27회 한국 프로골프선수권에서도 최윤수를 1타 차로 따돌리고 2년 연속 리더보드 최정상에 이름을 기록했다. 당시 51회를 맞은 한국 프로골프선수권에서 연승 한 선수는 네 명밖에 없었을 정도로 뛰어난 기록이었다. 그는 이듬해부터 한국 무대에서 일본 투어로 눈을 돌렸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간간이 일본 투어에 출전했다. 1988년 던롭 피닉스오픈에서 공동 48위를 기록한다. 1990년 싱가포르 요코하마 타이어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해외 투어의 매력을 느꼈다. 결국 199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 골프투어에서 활동한다. 연덕춘과 한장상이 일본 오픈에서 우승하기
는 했지만 일본 투어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활동한 것은 임진한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총 12개 대회에 출전해 닛케이 컵에서 전보다 나아진 공동 32위를 기록한다.


이듬해인 1993년 임진한은 결국 사고를 친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3승을 쓸어 담은 것이다. 1993년 일본 챌린지 투어에서 활약하고, 그해 5월 도치기현(とちぎけん)의 간토 고쿠사이 컨트리클럽(KANTO KOKUSAI COUNTRY CLUB)에서 열린 간토 고쿠사이 오픈에서 11언더파 133타로 일본 진출 후 첫 승을 올렸다. 바로 다음 주, 한국에서 열린 일간스포츠 포카리 오픈에서 8언더파 280타로 우승한다. 그리고 같은 해 오이타현(おおいたけん) 소재 키지마 고원 골프 클럽(KIJIMA KOGEN GOLF CLUB)에서 열린 코라쿠엔컵에서 1언더파 141타로 일본에서도 2승을 올리면서 최고의 해를 맞이한다.

 


“일본 투어에서 활약할 때 골프는 지갑이 두툼할 때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정말 힘들었습니다. 한 대회에 출전하려면 30만 엔, 연간 700~800 만 엔(한화 약 6,240만 원)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일본 투어는 오자키, 아오키군단 30명~40명이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위 입상은 더욱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대회에서 상금을 획득하지 못하면 그 주의 생활이 비참해졌습니다. 편의점에서 50엔짜리 주먹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둔 주먹밥은 꼭 얼음을 넘기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생각 때문인지 샷을 할 때 손이 몹시 떨렸습니다.” 임진한 선수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긍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스윙이 좋다고 우승하는 것은 아닙니다. 프로 골퍼라면 누구나 우승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골프를 왜 하는가?’, ‘어떤 선수가 되려는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늘 생각했고, 실천하려 노력한 것이 주요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그가 1996년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그해 팔꿈치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귀중한 승리를 챙겼다. 같은 해 3월 청주 골프장에서 열렸던 제1회 낫소 초청 골프대회에서 김종덕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 우승을 어렵다고 생각했던 그는 2000년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낫소 초청 대회 우승 이후 지도자로서 힘을 쏟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태영 골프장에서 열린 SBS 프로 골프 최강전 초청 선수 자격으로 출전한다.

 

 

그는 처음에는 대회 출전을 고사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회사의 끈질긴 부탁에 하는 수 없이 경기에 참석하게 된다. 그저 참석에 의의를 둔 것이었다. 하나, 생각과는 다르게 이 대회 4강전에서 연장 혈투의 고비를 넘기며 결국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린다. 오전에 8강에서 이긴 후 오후에 4강에서 이해우와의 연장 전까지 치렀지만 결국 승부를 내지 못했다. 결승전 당일 오전에 열린 네 번째 연장전에서 3홀 차로 승리한다. 그는 이후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스타를 키우는 유명한 지도자이자 골프 채널의 스타 프로로 명성을 얻는다. 골드와 이포 골프장에 아카데미를 열기도 했고, 2005년 1월에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임진한 골프 아카데미 USA를 개원하는 등 프로 때보다도 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