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OPLE & STORY |
골프를 예술로 승화시킨
세베 바예스테로스
세베 바예스테로스(Seve Ballesteros)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창조적인 샷을 구사했다. 그의 쇼트 게임을 본 사람들은 그를 골퍼라고 하지 않고 예술가라고 칭송했다.갤러리들은 그의 독창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플레이에 매료됐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사랑과 존경을 받은 선수다.
글 박진권 기자 참고 자료 박노승 <더 멀리, 더 가까이>
스페인 북쪽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탄생한 영웅
세베는 1957년 4월 9일 스페인 북쪽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 페드레나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페드레나는 인구 20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부자들이 자주 모이는 리얼 골프 페드레나라는 골프 클럽이 있었다. 세베의 4형제 모두 프로 골퍼가 되는데, 모두 이 골프장의 캐디 출신이다. 덕분에 세베는 자연스럽게 골프를 구경하며 배울 수 있었다.
7살이 되던 해 세베는 처음으로 낡은 골프 클럽의 헤드를 얻었다. 그는 나뭇가지로 샤프트를 만들어 낀 다음 자갈로 스윙 연습을 시작했다. 이를 본 형들이 헌 골프공 몇 개를 주었고, 세베는 공을 가지고 넓은 들판이나 바닷가에서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둘째 형 마놀로는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여 세베의 스윙을 교정해 주기도 했다. 8살이 되기 전에 세베는 캐디 일을 시작했다. 그 시기쯤 마놀로는 동생에게 3번 아이언 골프채를 선물했다. 이 3번 아이언은 세베가 프로로서 필요한 샷의 감각을 개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캐디는 골프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어린 세베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골프장과 비슷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통조림 깡통으로 홀컵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박았다. 그곳에서 3번 아이언 한 개로 퍼팅과 벙커 샷 그리고 칩샷 등을 연습했다. 해가 질 무렵 달빛이 밝을 때 아무도 없는 골프장에 몰래 들어가 연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3번 아이언만 있었기 때문에 높거나 깊은 샷, 길거나 짧은 샷, 페어웨이이거나 깊은 러프도 마지막으로 벙커까지 전부 3번 아이언으로 해결했다.
세베는 집에 고기잡이 그물을 쳐 놓고 밤늦도록 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습은 바닷가에서 해야 했다. 그는 밤이 되어야 골프장 파3 홀로 가서 혼자 연습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회색으로만 보이는 밤, 공을 칠 때 느껴지는 진동과 소리만으로 공의 방향과 거리를 추측했다. 본능적으로 거리와 힘을 조절했다.
세베가 정식으로 골프를 칠 기회는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캐디 골프대회에서였다. 이날은 골프장 멤버가 골프 클럽과 공을 캐디에게 빌려주었다. 캐디 시합은 초급, 중급, 고급으로 그룹을 나누어 초급 9홀, 중급 18홀, 고급 36홀의 시합이었다. 세베는 9살 때 51타, 10살 때 42타를 치더니 중급으로 간 12살 때 79타를 쳐서 우승했다. 그 해에 8살 위인 둘째 형 마놀로를 18홀 라운드에서 이기면서 형제 중 최고임을 증명했다.
캐디 시합에서의 우승으로 세베는 골프장에서 연습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더 이상 바닷가에서의 연습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세베는 매일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연습과 라운드를 계속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2등을 16타 차이로 리드하며 우승했다.
전성기의 시작 최연소 상금왕
세베는 16살에 정식 프로골퍼로 등록했다. 공식적인 아마추어 시합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지만, 당시에는 골프 클럽과 골프공만 있다면 프로 등록이 가능했다. 프로 등록 며칠 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시합에서 프로 데뷔 경기를 하게 되었다. 아직 드라이버도 사지 못한 세베는 3번 우드로 티 샷을 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20위로 마무리했다.
1974년 세베는 처음으로 스페인 밖에서 열리는 시합을 참여했다. 그 시합은 17세 생일에 열린 포르투갈 오픈이었는데, 그는 한 라운드에서 89타를 치며 최하위가 되었다. 10월 베니스에서 열린 이탈리안 오픈에 출전한 세베는 5위를 하면서 처음으로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비교할 수 있었다. 당시 1973년 US 오픈 챔피언이며 잭 니클라우스를 누르고 세계 랭킹 1위로 인정받고 있던 조니 밀러의 플레이도 볼 수 있었다. 세베는 비록 5위로 끝났지만, 자기가 밀러보다 더 잘 칠 수 있고 세계의 다른 강자들과 대결해도 그들을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1975년 시즌이 끝날 무렵 미국인 에드 바너가 세베의 정식 매니저로 일하게 됐다. 바너는 세베가 미국 PGA로 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6라운드에서 9홀을 33타로 마친 세베의 합격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합격하면 연말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미국 시합에 참여하는 일정이라 크리스마스나 연말 파티를 가족과 함께할 수 없었다. 미국 투어의 낯섦과 외로움도 걱정됐다. 한마디로 그는 아직 미국 투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후반 9홀을 40타로 끝내면서 합격의 기회를 스스로 던져버렸다. 이후 세베에게 미국 골퍼는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군이 되어 있었다.
1976년 디 오픈이 링크스 코스인 로열 버크데일에서 열렸다. 그는 1975년 유럽 대륙 상금왕 자격으로 참가가 확정되었다. 전년도에 처음 참가했던 디 오픈에서 로열 세인트 조지의 링크스 코스를 경험한 세베는 상상력과 창조적인 샷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링크스 코스가 자기의 경기 스타일에 잘 맞아 자신감이 높아진 상태였다. 첫 라운드를 69타로 마친 세베는 공동 선두였고 둘째 라운드에서 다시 59타를 친 그는 2타 차 단독 선두에 나섰다. 스페인에서 온 19세 무명 선수는 영어 인터뷰가 불가했지만,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 열풍을 견뎌야 했다. 조니 밀러와 함께 플레이한 3라운드에서 73으로 부진했지만, 아직 밀러에 2타 차 선두를 유지했던 세베는 자신의 우승을 의심치 않았다. 마지막 라운드에 다시 조니 밀러와 함께 플레이한 세베는 6번 홀에 더블 보기, 11번 홀에 트리플 보기를 치면서 밀러에게 선두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우승까지 내준 세베는 자극과 분노를 느꼈다. 경기 종료 후 우승자 인터뷰에서 밀러가 말했다. “나는 세배가 우승하지 못한 것이 잘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곧 올 것이다.”
1976년 시즌은 성공적이었다. 디 오픈 준우승 이외에도 벨기에에서 개리 플레이어를 꺾으며 우승했다. 프랑스에서는 아놀드 파머를 2위로 밀어내며 우승했다. 또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에 출전해 마지막 라운드에서 미국을 격파하며 우승까지 차지했다. 당시 아무도 스페인의 우승을 예상하지 않았다. 시즌이 끝나면서 세베는 유럽 PGA의 상금왕이 됐다. 역사상 최연소 상금왕이었고 1953년 이후 최초의 비 영국계 선수의 상금왕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1977년 세베는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뉴질랜드에서 골고루 우승하며 다시 유럽 투어의 상금왕을 달성했다. 1978년에도 좋은 성적은 계속됐으며 11월까지 7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79년에는 대회 참가를 앞두고 죽은 스페인 동료의 유족에게 상금을 전달하기도 하는 등 선행까지 이어갔다.
20세기 최연소 디 오픈 챔피언
세베는 1979년 로열 리담 & 세인트 앤스에서 개최된 디 오픈을 준비하기 위해 일찍 현지에 도착했다. 연습 라운드 때 만난 아르헨티나의 영웅 로베르토 데 비센조가 중요한 코스 공략법을 가르쳐 주었다. 비센조는 1967년 디 오픈의 우승자였다. 그는 세베에게 모든 홀에서 드라이버 샷을 최대한 길게 칠 것을 주문했다. 샷이 그린으로 가까워질수록 러프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세베는 시합 내내 비센조의 지시를 잊지 않았다.
세베는 드라이버로 티 샷을 한 9개의 홀에서 페어웨이를 한 번밖에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환상적인 쇼트게임으로 번번이 위기를 넘겼다. 벤 크렌쇼는 세베가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쇼트게임을 했다고 감탄했다. 4라운드 동안 그린 사이드 벙커에 15번 들어갔지만, 14번을 세이브하여 벙커 샷의 최고수임을 증명했다. 결국 그는 1언더 파 283타의 점수로 그의 첫 번째 메이저 우승을 달성했다. 세베는 22세에 우승하여 20세기 최연소 챔피언이 되었다.
1977년 세베는 처음으로 마스터스에 초대됐다. 세베는 컷을 통과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당시 24위까지 다음 해에 자동 초대되는 규정이었는데 세베는 순위 내에 들지 못했다. 1978년과 1979년에도 출전했으나 각각 18위와 12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1980년 세베는 드디어 마스터스에서도 우승을 차지한다. 전년도에 디 오픈을 우승한 세베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세베는 유럽인 최초의 마스터스 우승자이며 두 번째 논-아메리칸 우승자가 됐다. 1983년 세베는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두 번째 마스터스 우승으로 그린 자켓을 입게 됐다.
1984년 디 오픈은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 코스에서 개최되었다. 세베는 경기하는 동안 자신감을 드러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그의 상징적 의상인 청색 바지에 흰색 셔츠 그리고 청색 스웨터를 입은 세베의 모습은 1979년 우승 사진과 동일했다. 18번 홀에서 세베는 버디를 기록하며 2타 차로 우승을 차지한다.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고 주먹을 치켜올리는 세베의 모습은 그의 상징이 되었다.
1988년 세베의 메이저 5승째이며 마지막 메이저 우승인 디 오픈이 로얄 리담에서 열렸다. 1979년 이곳에서 우승한 후 9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결국 세베는 우승컵인 클라렛 저그를 다시금 들어 올리며 기쁨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