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서주원 기자 | ‘10·26사건’,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벌어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권총으로 박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등 4명을 저격해서 살해했다.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울린 몇 발의 총소리에 18년 동안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내년 가을 개봉 예정인 다큐멘터리 영화 ‘파천(破天) 1026’은 ‘10·26사건’을 다룬다. 오랫동안 영화 제작을 준비해 온 최위안 감독을 며칠 전인 10월 26일 충무로에서 만났다.
Q. 영화 제목을 ‘파천(破天) 1026’으로 정한 이유는?
A. 원래 ‘1026’으로 제목을 정했다. ‘파천’은 부제였다. ‘하늘을 깬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혁명’을 상징한다.
Q. 언제부터 이 영화를 준비했는지?
A. 김재규 장군에 대한 영화 제작을 제작하겠다고 최종적으로 마음을 굳힌 건 약 5년 전이다.
Q. 김재규 장군, 호칭이 맞는지?
A. 장군은 군 출신이고, 중장으로 예편했다.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도 역임했다. 10·26사건 이후 법정 최후 변론에서도 ‘본인은 장군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장군은 사형 집행 전날, 동생과 부인에게 ‘나는 장군 군복을 입고 죽고 싶다’는 요지의 유언도 남겼다. 물론 이 유언을 이후 정권을 틀어쥔 군부가 묵살했다.
김 장군은 역사에 장군이라는 직함으로 남고 싶어 했다. 해서 나는 그 분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늘 장군의 호칭을 붙인다.
Q. 40여 년이 지난 사건이다. 이 시대에 왜 ‘10·26’인가?
A. 오늘의 정치판이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김재규 장군의 거사, 즉 정치혁명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시대에 ‘10·26’를 꺼내자면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장군을 역사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니 어떤 영화인이 ‘10·26’ 재조명하겠다고 나서겠는가.
‘10·26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는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청운의 꿈을 꾸고 있던 내게 충격도 주었고, 감동도 주었다. 왠지 모를 일인데, 그 시절부터 나는 장군에 대한 부채 의식이 생겼다. 양심의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8·15 광복 이후 여러 번의 시민혁명을 겪었지만 좌우의 대립,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인 정쟁은 여전하다. 이런 구태적 정치판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 김재규 장군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영화 제작에 나섰다.
Q. ‘10·26사건’에 대한 개인적 평가는?
A. 1970년대 유신 치하, 정말 암흑기였다. 그 시절, 내 주변의 어른들 가운데는 ‘박정희는 언제 죽을까?’, ‘김일성도 빨리 죽어야 될텐데…’, 뭐 이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사춘기를 겪던 내 주변의 친구들 중에도 박정희의 군부독재가 하루빨리 끝나길 바라는 아이들이 다수 있었다. 오죽 답답한 세월이면 청소년들까지 그랬을까.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 군부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18년 동안 이어진 질곡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펼쳐진 암흑의 벽을 뚫었다.
장군은 군부독재의 연장에 혈안이 된 박정희 정권의 폭압 정치를 종식시켰다.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이 그 빛을 금세 지웠지만 장군은 이 땅에 자유와 민주의 빛을 뿌렸다. 그런 다음 역사의 뒤안길로 당당한 걸음걸이로 모습을 감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