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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계의 G.O.A.T ‘영원한 홈런왕’ 조지 허먼 '베이브' 루스 上

‘영원한 홈런왕’ George Herman ‘Babe’ Ruth  
   
   
지난해 야구계에서 가장 뜨거웠던 뉴스는 108년 만에 염소의 저주를 깨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시카고 컵스였다. 시카고 컵스는 이 저주를 깨는데 무려 7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염소의 저주에 대해 간략히 말해보자면, 1945년 그리스계 이민자인 빌리 사이니스는 머피라는 이름의 염소를 가족처럼 아껴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 필드에 함께 입장하려다 저지당했다. 당시 컵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와 우승을 놓고 월드 시리즈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컵스의 구단주였던 필립 K 리글리는 염소가 악취를 풍긴다며 시아니스에게 염소와 함께 퇴장을 요구했고, 시아니스는 그 후 더 이상 컵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 저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시카고 컵스는 월드 시리즈 진출조차 못한 채 70년 넘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 염수와 저주와 쌍벽을 이뤘던 저주에는 밤비노의 저주가 있다. 밤비노의 저주란 보스턴 레드 삭스가 1920년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를 트레이드 시킨 후, 수십 년 동안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밤비노의 저주는 2004년 월드 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 삭스가 86년 만에 우승을 거두면서 오랜 베이브 루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다. 야구 및 세계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저주 중 하나이며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기도 했다. 베이브 루스의 별명인 밤비노의 저주가 유명했던 이유와 보스턴 레드삭스에 오랜 암흑기가 온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베이브 루스 때문이다. 






 
1900년대 초반 메이저 리그를 호령했던 베이브 루스의 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George Herman Ruth)이다. 베이브라는 애칭이 붙은 이유는 루스가 프로 선수가 되기 전까지 너무 순진무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애’라는 뜻의 '베이브'란 별명이 붙었다. 초창기 루스는 투수로 자신의 야구 생활을 시작했고, 추후 투수와 타자 양쪽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던 중 보스턴 레드 삭스는 1919-1920 시즌 오프 시기에 베이브 루스를 라이벌 팀인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이후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팀으로, 보스턴 레드삭스는 밤비노의 저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베이브 루스는 투수가 아닌 오직 타자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될 만큼의 홈런 생산력을 보여주며 ‘홈런의 시대’를 연다. 루스의 인기는 뉴욕에서 상상을 초월했고, 이에 따라 양키스의 홈구장이었던 양키스타디움은 만원 관중을 이룬다. 당시 루스는 이적한 첫해에 홈런 54개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을 새로 세운다.


루스의 54개의 홈런은 현대 야구에서도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기록이다. 당시 야구 타격 기술이나 다른 것들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54개는 그야말로 대단한 기록이다. 루스가 홈런왕을 차지할 당시 한 시즌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은 고작 27개였다. 루스는 단숨에 그 기록을 두 배로 늘린 것이다. 그뿐 아니다. 루스는 약체라 평가받던 양키스를 월드 시리즈 챔피언에 자리까지 올려놓는다. 이런 루스의 커리어 활약이 있었기에 양키스는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한편 또 다른 루스의 홈런에 관한 일화 중 하나는 그가 1927년 기록한 60개의 홈런을 꼽을 수 있다. 이 기록은 후대 로저 매리스와 배리 본즈에 의해 깨지긴 했으나 당시 리그의 홈런 수치로는로 살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60홈런 자체가 리그 전체의 15%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당시 아메리칸 리그 팀 홈런 2위 팀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전체 홈런이 루스가 혼자 기록한 60개보다 네 개나 적은 56개였다. 이 점을 상기해 본다면, 루스의 홈런 자체가 얼마나 경이적이고 말도 안 되는 기록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루스하면 유명했던 것은 ‘예고 홈런’이었다. 병상에 있는 아이를 위해 홈런을 예고하고 공을 펜스 밖으로 날렸다고 전해지는 이 일화는 사실 만들어진 신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에 대해 당시에도 야구 관계자들은 설왕설래를 오갔지만, 정작 루스 자신이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불우했던 유년시절로 인해 어린애들에게 관대했던 루스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루스에 관한 오해와 진실  
   
흔히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말할 때  루스가 삼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로 언급한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루스는 커리어 통산 700개가 넘는 홈런을 쳤다. 그리고 삼진은 그 2배도 안 되는 숫자인 1330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보면 8타석 당 1개의 삼진, 두 경기당 1개의 삼진을 당한 것이다. 이에 대해 몇몇 잘못된 오해로 루스가 홈런 1개를 치기 위해 3개씩의 삼진을 당했다고 말하는 루머가 있는데, 이는 기록 자체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후대의 대부분의 홈런왕보다 루스의 삼진 개수는 훨씬 적다. 그렇다면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루스가 뛰던 당시를 기준으로 선수들은 잘 나오지 않는 홈런보다는 삼진을 당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공을 맞히는 것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두 번째 루스에 관한 오해는 그가 굉장히 비만형의 체형을 가졌다는 것이다. 루스는 커리어 말년을 제외하고는 187cm라는 건장한 체격에 100kg이 안 되는 체중을 유지했었다. 물론 술과 담배 등을 좋아하는 무절제한 생활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체중과 체지방 자체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높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그가 비만처럼 보였을 뿐 오히려 체지방과 근육이 적절히 섞인 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후대의 평가다. 주루 능력 또한 좋았다고 전해진다. 도루도 곧잘 했으며 통산 도루는 123개에 달한다 물론 도루 실패가 꽤 되었으나, 이는 달리기가 느렸다기보다는 주루 센스가 부족했다고 전해진다. 
   
경매서 24억 원에 팔린 '루스의 반지' 


   
최근 베이브 루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와 그의 이적 계약서 원본이 경매에서 50억 원에 가까운 금액에 낙찰되는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인 ESPN에 따르면 경매 사이트인 리랜즈닷컴에서 끝난 경매에서 루스의 이름이 새겨진 1927년 루스의 우승 반지는 약 209만 3927달러(약 23억 9754만 원)에 낙찰됐다. 또 보스턴 레드삭스가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할 때 작성한 1919년 양도 계약서 원본은 230만 3920만 달러(약 26억 3798만 원)라는 고가에 팔렸다. 역대 최고치를 찍은 루스의 반지와 계약서 원본은 루스가 스포츠 역사에서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수를 방증하는 자료로도 평가된다. 루스가 이처럼 미국에서 인기 있는 이유는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풍미한 스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홀로 우뚝 섰다는 점과 더불어 추후 자신의 유년 시절을 잊지 않고 어린아이 및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실제 루스는 그 당시를 살았던 모든 어린아이들의 우승이었다. 루스가 사망한 후, 유해가 운구된 양키 스타디움에는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구장을 찾아들었다. 그중 절반이 소년이었다고 후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방제일 기자 reijir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