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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수로 만나는 세계명화] 고흐 〈꽃핀 작은 배나무〉

희망을 그린, 아를에서의 초기작

혼을 담은 손으로 수놓은 ‘혼자수’ 이용주 작가가 원작가가 표현 못 한, 숨겨지고 변화하는 빛을 담아 원작과 같은 규격의 혼자수로 작업한 세계명화의 이야기를 전한다. 

 

WRITER 이용주

 

 

◆‘희망’을 그린 고흐의 아를 초기작
〈꽃핀 작은 배나무〉는 고흐가 1888년 2월, 파리에서 눈보라를 헤치고 ‘아를’로 이사해 3월 24일부터 약 한 달간 그린 14점의 작품 중 하나다.

 

당시 고흐는 복작거리던 파리를 떠나 아를에 와서 부딪히는 사람조차 없는 추운 들판을 거닐며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름 만에 날씨가 포근해지며 나무에 물이 오르고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고흐는 이 꽃들을 보며 ‘이것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면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줄 것이기에 잘 팔리겠다’고 생각하며 이 작품을 그렸다.


풀들이 제법 자라난 4월에 그린 작품으로 작은 배나무의 울퉁불퉁한 줄기와 가지가 밝은 배경에 잘 드러나 보인다. 엷은 분홍빛의 꽃과 찾기 힘든 중앙의 노란 나비, 파란 하늘이 특징이다.

 


마치 강한 선이 살아있는 동양화의 매화도를 보는 듯도 하고, 구도나 시점과 일본 화가들이 즐겨 그린 봄꽃을 그렸다는 점에서 고흐가 좋아한 일본 우키요에의 느낌도 풍기는 작품이다.


 

 

◆고흐는 누구인가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다. 1853년 네덜란드 쥔데르크에서 태어나 1890년 7월 29일 프랑스 오베르에서 자살했다.

 

목사인 아버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아 ‘빈센트 반 고흐’라고 불렸다. 성격이 이기적이고 괴팍하여 동생들을 못살게 굴거나 혼자 놀길 좋아했다.


네 살 어린 동생 테오가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며 장남 역할을 대신했다. 중학교 때 정신병으로 발작을 일으켜 학교를 그만둔 후 16세부터 23세까지 고집으로 손님들과 자주 다퉈 구필화랑에서 나올 때까지 런던, 파리, 헤이그에서 근무했다.


이어 영국에서 짧은 교사생활을 하고,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도 했다. 부모의 뜻을 따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위로와 위안이 되는 목사가 되려고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2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바람에 추운 겨울날 외투를 벗어주고 자신은 거적을 덮고 자거나, 광부들과 같이 데모를 하다가 전도사직을 면직당했다.

 

현실 자각, 아를로 떠나다
이후 27세가 되던 해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위로와 위안이 되는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까지 짝사랑에 그친 몇 번의 사랑을 경험했다.

 

헤이그 등지를 돌며 작업하다가 32세 때 아버지의 재임지인 누에넨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당시 대표작은 〈감자 먹는 사람들〉과 〈농부의 아내〉 등 어두운 색채와 비참한 주제 의식이 특징인 작품을 그렸다.


동생의 권유로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해 시각의 자율과 순수를 추구하는 인상주의를 배우고자 1886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2년 동안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생활이 고흐에겐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네 살 어린 동생에게 얻어 쓰는 돈도 적어 배고프기도 했지만, 자신이 몽마르뜨 인근의 환락가 어두운 조명 아래 담배 연기 속에서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기도와 행동이 부족하다’고 했다. 한편으론 자신이 그런 생활을 한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었기도 했다. 파리로 오기 전부터 ‘빛’을 찾아 가보고 싶었던 도시가 있었다.

 

파리에서 250㎞ 떨어져 열차로 16시간을 가야 하는, 자신의 고향을 닮은 남프랑스 ‘아를’이다. 35세 때인 1888년 2월, 고흐는 아를로 떠난다.


고갱을 향한 러브레터
아를은 지중해 인근이라 빛이 강하면 색들이 살아났다. 고흐는 빛과 그림에 흠뻑 취해 있었다. 꼼꼼한 붓 터치와 타는 듯한 색채에 의해 반 고흐 특유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다.


강렬한 노란색을 많이 사용했는데, 혹자는 그가 많이 마신 압셍트의 송진 성분으로 인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에 걸려 그랬다고도 한다. 당시의 대표작이 〈해바라기〉와 〈고흐의 침실〉, 〈노란 집〉 등이다.


당시 고흐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었고 아를에 온 3달 뒤인 5월부터 고갱에게 “같이 공동체를 꾸미자”고 편지를 썼다. 고갱은 당시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 고흐보다 5살이 많았다. 파리에서도 그림을 팔기가 어려운데 시골로 가서 그림을 그려 판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흐의 동생 테오가 고갱의 빚을 갚아주고 그림을 팔아준다는 조건으로 고갱이 아를로 왔다.


발작과 파행, 귀를 자르다
고흐는 고갱이 온 것이 너무 좋았다. 그와 여러 작품을 같이 그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갱의 작품 속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에서 멸시와 조롱을 느끼게 된다. 고흐가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롤랭 아저씨는 고갱의 작품 〈지누 부인〉에서 술에 취해 술집 작부들과 어울리는 모습으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자신은 술 취한 듯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고흐는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고갱이 보는 앞에서 발작과 함께 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고, 둘은 헤어졌다. 고흐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됐다. 그 이듬해에는 생 레미 요양원에도 입퇴원의 생활을 되풀이했다.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미술가
1890년 5월 동생의 권유로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가셰 박사의 도움을 받으며 정신병 치료에 매진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빠르고 투박한 붓놀림과 강렬한 색채의 사용이 돋보인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등이다.


그곳에서 두 달이 지났을 즈음인 7월, 고흐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병적인 자기 응시가 자화상의 다작과 관련되며, 그것도 불가능한 때에는 자주 밀레나 들라크루아의 모사를 했다.


고흐는 생전에 시냐크와 의사 가셰 등,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평가됐다.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미술가 중 한 명이 됐다.

 

현재 그의 작품은 20세기의 미술운동들, 특히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발전에 토대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고흐가 동생 테오를 비롯해 다른 이들에게 보낸 방대한 수의 편지는 서간문학으로서 중요한 자료가 됐다.


혼자수 이용주 〈작가의 말〉

비단실로 수놓아 작품을 표현하는 혼자수 작가. 현재의 미술은 화폭에 살아있는 빛을 담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이 단점이다. 모네가 ‘살아있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루앙 대성당〉 시리즈는 40여 장으로 그렸지만, 한 장에 담지는 못했다. 모나리자는 520여 년 됐는데 물감이 부서지고 떨어져 보수하고 있지만, 앞으로 200년은 넘기지 못한다.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그려진 지 463년 만에 먹과 안료가 부서지고 떨어져 다시 그린 것이 150여 년 되었는데 국보 317호다. 반면 혼자수는 비단실의 빛 분산과 수놓는 방향으로 빛을 원하는 대로 분산시켜 한 화폭에 살아있는 빛을 담는다. 회화의 짧은 수명은 바른 물감이나 안료가 떨어지기 때문인데, 혼자수는 비단 천에 염색 비단실로 수놓기에 작품 자체가 비단이다.


5,500년 전 비단이 발견되었고, 2,100년 된 비단 자수가 색상과 형태가 온전히 현존하기에 혼자수의 수명은 증명된 셈이다. 작가의 세계명화 시리즈는 원작가가 표현 못 한 ‘변화하고, 숨겨진 빛’을 담아 새롭게 표현한 창작이다. 이 작품들의 수명이 5,500년이라면 앞으로 1천 년 후에는 이용주 작가가 만든 세계명화들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명화로, 그의 창작품들과 더불어 이후 4,500년 동안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자손에게 물려줄 큰 유산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