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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

지금으로부터 92년 전인 1932년, 15세의 어린 소년이 경성골프클럽 군자리 코스를 찾아간다. 캐디 마스터인 조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카로부터 캐디 마스터실 보조 역을 제안 받는다. 이게 그와 골프의 첫 인연이다. 골프장에 취직한 이 소년은 그 골프장 프로로부터 진짜 골프 클럽 1개를 선물 받은 후 프로 골퍼의 꿈을 키운다. 그 클럽으로 수십만 번의 스윙을 한 소년은 불과 1년 만에 파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이 소년의 이름은 ‘연덕춘’이다.

 

EDITOR 방제일 자료 한국프로골프 40년사 발췌

아직까지 어둠의 일제강점기던 1916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뚝섬에서 2남 3녀 중 2남으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아버지인 연군학 씨는 아이의 이름을 ‘덕춘’으로 짓는다. 농사를 짓던 연 씨 가족은 뚝섬에 홍수가 나, 화양리로 이사를 한다. 이것이 그의 둘째 아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을지 그는 알았을까? 연덕춘은 1930년에 개장한 경성 CC 군자리 코ㅅ 인근에 살았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당시 소학교) 시절부터 ‘골프’라는 스포츠를 쉽게 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경성 CC 캐디 마스터로 일했던 조카 김종석을 만나러 갔다가 캐디 마스터실의 보조 자리를 얻어 취직까지 한다. 묘한 인연이자, 어쩌면 운명이었다.


당시 이 골프장의 프로였던 시라마스는 연덕춘과의 친분이 있었고, 이후 진짜 클럽 1개를 선물로 준다. 그 클럽으로 수없는 스윙을 하며 연덕춘은 프로 골퍼의 꿈을 키운다. 골프 연습을 본격적으로 한 지 1년이 지난 후에는 그는 조카 김종석을 비롯해 주변에 잘 친다는 골퍼들을 크게 이기는 수준에 오른다. 그때가 연덕춘의 나이 16세 때다.

 

경성골프클럽의 프로가 되다
연덕춘에게 클럽을 주었던 시라마스는 개인적인 일로 인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경성 CC 클럽의 프로 자리는 공석이 된다. 군자리 코스를 운영하는 경성골프클럽에서는 그때쯤 프로자리에 조선인을 앉히자는 여론이 일었다. 당시 후보는 셋이었다. 연덕춘과 그의 조카인 캐디 마스터 김종석, 그리고 식당 주임인 배덕산(배용산의 형)이었다. 프로 자리를 놓고 18홀의 경기를 진행했고, 그 결과 연덕춘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며 프로로 선발됐다. 그러다 경성 CC 조선인 회원 몇몇은 연덕춘의 천부적인 자질을 알아봤다. 이들은 연덕춘을 일본으로 보내 골프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클럽 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1년이 지난 후에야 이뤄진다. 1934년 12월 연덕춘은 골프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그때 연덕춘의 나이는 18세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연덕춘은 경성 CC의 톱 플레이어 박용균과 일본인 도미노의 주선으로 아카보시는 만난다. 아카보시는 경성 CC의 코스 설계자이자, 1927년 열렸던 제1회 일본 오픈에서 프로를 이기며 우승한 일본 골프계의 거물이었다. 아카보스는 일본오픈과 일본 프로선수권에 출전하기에 앞서 후지사와 CC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연덕춘도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이후 연덕춘은 후지사와 CC에서 1993년 일본 오픈에서 우승했던 나카무라의 지도를 받는다. 이후 1935년 2월, 일본 관동골프연맹으로부터 프로 자격증을 획득한 연덕춘은 그해 3월부터 매월 관동 프로 월례회에 나가 평균 85.6타를 기록한다. 그해 10월, 일본오픈에 처음 도전했지만 아쉬운 성적으로 컷오프 한다.

 

골프를 배운 지 10년 만에 일본 오픈 제패
일본에 프로 자격을 획득한 연덕춘은 1936년 4월 귀국 후 경성 CC 전속 프로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는 회원들의 레슨을 맡았고 지방에 위치한 골프 구락부의 초청을 받아 시범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1937년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8위라는 좋은 성적을 냈고, 이듬해엔 후지사와 골프장에서 열린 같은 대회에서 전년도 우승자인 진청수와 함께 공동 5위를 차지하며 점차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1938년 다카라츠카 골프장에서 열린 일본프로골프선수권대회에서 아쉽게 3위를 차지한 연덕춘은 결국 1941년 5월 총 73명(아마추어 24명)이 출전한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4라운드 합계 290타를 기록하며 우승의 영광을 차지한다. 한국인 프로 골퍼의 일본오픈 첫 제패이자, 역사적 순간이었다. 당시 연덕춘의 나이 26세였으며, 골프클럽을 잡은 후 10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이 우승으로 연덕춘은 아시아의 톱 클래스 프로 대열에 합류한다. 서울 변두리 군자리의 캐디였던 소년이 부와 명성을 안고 경성의 명사록에 이름을 올리는 신분 격상까지 이룬, 그야말로 ‘인간 승리’였다. 무엇보다 이 대회가 의미가 있었던 것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열린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였다는 것이다. 그 해 일본의 또 다른 메이저대회였던 일본프로골프선권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만약 열렸다면 이 대회에서 우승 0순위는 당연히 연덕춘이었다. 이듬해에는 일본프로골프선수권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해에는 일본오픈이 열리지 않았다) 1943년은 태평양전쟁 말기로 경성 CC를 비롯해 한반도의 모든 골프장이 폐장됐다. 이때부터 연덕춘의 불운도 함께 시작됐다.

 

프로골프회를 결성하다
일본의 패전으로 광복을 맞았지만 한국 전쟁으로 한반도는 폐허가 됐다. 이제 전성기를 맞이한 나이였던 연덕춘으로는 그야말로 허송세월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는커녕 제대로 연습할 골프장도 없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가 다시 클럽을 잡게 된 것은 군자리 코스가 복구돼 개장한 1954년경이다.

 

연덕춘의 나이도 그때는 이미 마흔을 바라보는 때였다. 한국전쟁 후인 1957년 필리핀 오픈에 출전해 6위, 영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박명출과 짝을 이뤄 출전해 개인전 28위를 기록했다.

 

이는 그의 긴 공백기를 고려해 보자면 매우 뛰어난 결과였다. 1958년 열린 제1회 한국 오픈에서는 미국 선수에게 패해 국내 최초의 내셔널 타이틀은 빼앗겼다. 그러나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는 정상에 오르며 자존심을 지켰다. 1960년엔 홍콩 오픈에 8위를 기록하며 여전히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던 그는 이후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을 도모하며 후배 양성과 코스 설계라는 ‘제2의 골프 인생’을 계획한다. 연덕춘을 주축으로 한 친목 단체 성격을 띤 프로골프회가 결성된 것은 지난 1963년이었다. 이 모임의 회칙은 프로 골퍼 자격 부여 규정과 함께 골퍼가 지켜야 할 의무 조항을 명시하고 있었고, 이는 사실상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의 출발점이 됐다.


후배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던 그는 한장상을 비롯해 홍덕산, 이일안, 강영일, 조태운 등을 길렀다. 후배들과 함께 한국프로골프협회를 발전한 것은 1968년으로 그는 초대 허정구 회장 아래서 상무를 맡았고, 1972년에는 제2대 회장에 취임해 세력 확장에 힘썼다. 아울러 코스 설계가로도 활약하면서 1960년 한양CC 구 코스 189홀을 설계했고, 동래, 인천국제, 제주, 수원, 태광, 여주, 양주 등 10여 개 코스를 만들어내면서 선수로 이루지 못한 꿈을 코스 설계에 풀어놓았다.

 

2004년 향년 88세로 타계한 연덕춘
연덕춘의 제자였던 한장상은 연덕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항상 조용한 성품에 생전 화를 내는 일이 없던 스승”. 골프가 추구하는 신사의 정신을 그 누구 보다 앞장서서 실천했던 연덕춘은 2004년 5월 11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 1960년대 후반부터 골프 기사를 썼던 골프 칼럼니스트 고 최영정 씨는 “일제강점기에서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 5년 후 일본 골프 최정상인 일본오픈을 제패함으로써 억눌린 한민족 감정에 사기를 북돋아 준 그의 타계는 일본 강점기에 빛을 낸 한국인 스포츠 영웅의 마지막 사망”이라고 애도하기도 했다. 한국프로골프협회 또한 한국인 최초의 프로 골퍼인 그를 기리기 위해 시즌이 종료된 후 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그의 이름에서 따온 ‘덕춘상’ 시상을 시상하고 있다.

 

< 연덕춘이 남긴 기록들>
1932년 경성골프클럽 군자리 코스 취직
1934년 일본 후지사와 CC에서 골프 수업
1935년 일본 관동연맹으로부터 프로 자격 획득 후 일본오픈 첫 출전.
1936년 경성 CC 헤드 프로
1937년 일본오픈 8위
1938년 일본프로골프선수권 3위, 일본오픈 공동 5위
1939년 필리핀오픈 13위
1940년 일본오픈 공동 18위.
1941년 일본오픈 우승
1942년 일본프로골프선수권 2위
1953년 광복 후 서울CC 군자리 코스 복구에 앞장
1956년 필리핀오픈 6위 월드컵 골프(영국) 박명출과 출전해 개인전 28위.
1958년 제1회 한국프로선수권 우승, 필리핀오픈 4위
1960년 홍콩오픈 9위
1963년 한국프로골프협회 전신인 프로골프회 발족 주도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 주도
1972년 한국프로골프협회 회장
1974년 관악컨트리클럽 부사장
1980년 대한공영 회장, 한국프로골프협회 고문
2004년 향년 88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