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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한장상

집 근처에 있던 군자리 코스가 놀이터인 한 소년이 있었다. 호기심 때문에 울타리 너머 골프장을 기웃거렸다. 처음에는 뭐 하는 곳인가 궁금해서였고, 이후에는 운명에 끌리듯 군자리 골프코스를 찾았다. 1954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는 마음먹고 골프장을 찾았다. ‘캐디를 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잘하면 골프를 배울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희망이 샘솟았다. 캐디 마스터를 만나 캐디를 시켜 달라 떼썼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하지만 소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 소년의 이름은 ‘한장상’이다.

 

EDITOR 방제일 자료 한국프로골프 40년사 발췌

 

어린 소년의 요청에 당시 캐디 마스터는 ‘캐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포어(fore) 캐디를 하라’라고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1년쯤 지나자 아르바이트 캐디 일을 하기 시작했고, 1년쯤 지나자 한 손님이 그에게 낡은 5번과 7번 아이언을 선물한다. 그 선물을 받고 기뻐했던 소년은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골프 스윙을 흉내 낸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어설펐겠지만, 그는 진지하게 골프를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그러다 골프를 하게 될 계기가 생긴다. 바로 아이언을 부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한 소년을 꿈꾸게 했던 윌슨 아이언 세트


1956년 군자리에서 골프를 즐기던 미국대외원조처(USOM) 요원들이 군자리 코스를 운영하는 서울 컨트리클럽의 전 직원과 캐디들이 참여하는 대회를 열었다. 1위에게 주어지는 부상은 윌슨 아이언 세트였다. 이 클럽의 주인공은 한 소년이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한장상이다. 클럽이 생긴 그는 틈만 생기면 연습했다. 서울 컨트리클럽에서 골프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 창설한 ‘양성자 과정’에 입문하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물론 ‘양성자 과정’이란 그럴듯한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상은 골프장의 온갖 궂은 일을 하고 일과가 끝난 후에 운동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1958년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이 열렸다. 한장상도 이 대회에 출전했다. 아직 프로 골퍼가 아닌 상황이었다. 이 대회에는 연덕춘을 비롯한 20여 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이때 그는 7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프로 골퍼로서의 희망을 발견했던 한장상은 대회 이후 연습량을 더욱 늘렸다. 이 당시 연습을 두고 한장상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하루는 마음먹고 볼을 쳐봤지요. 당시 서울CC 연습 볼이 모두 5,000개였을 때였습니다. 리어카에 모두 실으면 4000개 정도는 됐고, 여기서 손님들이 칠 볼을 좀 빼놓고 쳤지요. 정확하게 3,620개를 쳤지요.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 20분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매일 1,000개 이상의 공을 친 한장상
한장상은 당시 하루 1,000개 이상의 볼을 쳤다. 맨땅에서 장갑도, 볼 자동 지급기도 없던 상황이었다. 골프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신발에 두꺼운 가족 덧창을 대고 못으로 쇠징을 박아 신으며 골프를 쳤다. 연습 후에는 면도날로 손에 박힌 굳은살을 깎아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골프장에서 공고를 하고 하루에 얼마나 많은 홀을 소화할 수 있는지 홀로 도전해보기도 했다. 당시 함께 라운드했던 파트너는 아마추어인 신태화, 한용선이었다. 90홀을 소화한 이후 한용선은 더는 못 치겠다며 라운드를 그만뒀다. 그러나 한장상은 신용화는 113번째 홀까지 라운드를 이어나갔다. 더 치고 싶었지만 해가 졌기에 더 기록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침 6시에 출발해 백을 멘 캐디가 중간에 지쳐 4명이나 교체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만큼 한장상은 골프라는 스포츠에 진심이었다..

 

한해 1승 이상 거두며 연 ‘한장상 전성시대’
1958년 열렸던 제1회 한국오픈에서 7위를 했을 당시 최종 라운드에서 한장상은 자신의 베스트 스코어인 4오버파 76타를 쳤다. 이듬해 열린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도 다시 7위를 한 한장상은 1회 때보다 24타를 줄였다. 그리고 그 해 한국오픈에서 공동 3위를 도약했다. 첫 우승이 거의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국 1960년 한장상은 결국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프로골프선수권 2라운드에선 공식 대회 첫 언더파(3언더파 69타)를 치며 역사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4라운드 합계 7오버파 295타로 정상을 밟은 한장상. 그는 골프장을 기웃거리던 소년에서 불과 6년 만에 우승이라는 결실을 보며 서서히 전설을 써 내려갈 준비를 했다.


1962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른 한장상은 1964년 조태운을 비롯한 2위 그룹을 13타 차로 따돌리며 한국 오픈에서 우승하며 내셔널 타이틀을 따낸다. 이후 1967년까지 4년 연속 한국 오픈 정상을 차지했고, 또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년 연속 한국프로골프선수권, 1980년부터 1972년까지 3년 연속 한국 오픈 리더보드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국내와 해외에서 한해 1승 이상을 거두면서 그야말로 ‘한장상 전성시대’를 열었다.


골퍼로서 한장상의 가장 큰 장점은 ‘장타’다. 당시 퍼시몬 헤드와 스틸 샤프트의 드라이버로 290야드의 거리를 냈다. 당시 그는 1960년대 홍콩 오픈에서 열렸던 드라이버 샷 컨테스트에 출전해 283야드를 치며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장상은 당시 자신의 장타 비결로 어깨와 팔 힘을 꼽았다. “키가 큰 사람이 (장타에) 유리한 것이 사실이지요. 나는 키가 작지만, 어깨와 팔 힘이 누구보다 좋았습니다. 특히 팔씨름은 절대 지지 않았지요. 1970년대쯤인 것 같은데 홍콩 오픈을 끝내고 태국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대부분의 선수가 한 비행기를 탔었습니다. 그 비행기 안에서 팔씨름 대회가 열렸지요. 리그전으로, 내가 결승에서 노랑머리 선수를 이겼습니다. 동양 선수들이 누구보다도 좋아했고, 마침 그 비행기 스튜어디스가 한국인이었는데 샴페인을 터뜨려주었습니다.”

 

일본오픈에 우승하며 마스터스에 첫발
1972년 아시아의 톱스타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한 해였다. 그는 고기를 먹고 체한 상태에서 출전한 일본 오픈에서 4라운드 합계 10언더파 278타라는 최저타수로 우승했다. 연덕춘이 1941년 한국인으로 우승한 첫 대회이자 일본 내셔널 타이틀을 차지한 지 31년 후의 일이었다.

 

1972년 일본 오픈 이전 대회보다 당연히 위상이 더욱 높아진 대회였다. NHK가 첫 방송을 했고, 일본 수상이 우승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그는 일본의 ‘골프 영웅’ 점보 오자키를 1타차로 물리치고 정상에 올라 기쁨을 더했다. 그해 한장상은 한국오픈과 일본오픈이라는 양국의 내셔널 타이틀을 모두 획득하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고, 그랜드모나코 오픈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해외투어 2승의 업적을 세운다. 일본오픈 우승은 그에게 큰 선물도 안겨다 준다. 바로 마스터스 출전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마스터스 출전이었다. 1973년 그는 구즈와 국제오픈을 끝내고 도쿄에서 시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매니저나 전속 캐디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시카고에서 오거스타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는 일도 우여곡절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오거스타에 입성한 그는 리 트레비노와의 9홀 연습 라운드와 또 하루의 연습 라운드 이후 마스터스 첫날 5오버파 77타로 대회를 마쳤다. 한국 골프사에 영원히 남을 ‘마스터스 첫 라운드’라는 족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3오버파 75타를 기록하면서 2라운드 합계 8오버파로 1타 차로 컷 탈락하며 3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프로골프선수권 50회 연속 출전 ‘대기록’
1974년 이후 승수를 쌓지 못했던 한장성은 1978년 오란씨 오픈과 쾌남 오픈에서 우승한다. 특히, 1981년과 1982년에는 동해 오픈(현 신한동해오픈)의 원년과 2회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하면서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1982년에는 상금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아쉽게도 한장상은 1982년을 끝으로 더는 우승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기록은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기록은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 처음 출전한 후 2007년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으면서 동일 대회 50회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 지난 2004년 6월에는 프로 대회 1000회 출전이라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이는 실력 외에도 엄격한 자기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는 기록이다. ‘내게는 아직 못다 이룬 꿈이 하나 있다. 꿈의 무대 오거스타 내셔널에서 열리는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는 한국인 골퍼를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2003년 11월께 발간한 자서전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라는 책에서 ‘늙은 골퍼 삶의 마지막 꿈’이라는 제목의 후기에서 위와 같은 말은 남겼다. 
“아버지는 ‘자나 깨나 골프장에 가서 살아라’고 하셨고 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볼을 쳤습니다. 당시 비옷이라는 것도 귀해서 농민들이 입는 우비를 입고 빗속에서 볼을 쳤지요. 그리고 1960년대에 외국 대회에 출전하니 우리와는 스윙이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그때 사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보고 돌아와 흉내를 내기 시작했지요. 6개월 동안 스윙 교정하느라 고생도 했지만 결국은 내 것으로 만들었고, 그네들의 스윙은 우리와 달리 간단하더라고요. 모방하고 연구했고, 결국은 내 것으로 만들었지요.”

 

<박스 기사> 한장상이 남긴 기록들
1960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2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4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5년 한국 오픈 우승
1966년 한국 오픈 우승
1967년 한국 오픈 우승
1968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9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70년 한국 오픈,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71년 한국 오픈,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72년 일본 오픈, 한국 오픈, 그랜드모나코오픈 우승
1973년 구즈와 국제 오픈 우승
1978년 오란씨 오픈, 쾌남 오픈 우승
1981년 동해 오픈 우승
1982년 동해 오픈, 쾌남 오픈 우승
국내 19승, 해외 3승
 


한장상은 당시 하루 1,000개 이상의 볼을 쳤다. 맨땅에서 장갑도, 볼 자동 지급기도 없던 상황이었다. 골프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신발에 두꺼운 가족 덧창을 대고 못으로 쇠징을 박아 신으며 골프를 쳤다. 연습 후에는 면도날로 손에 박힌 굳은살을 깎아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골프장에서 공고를 하고 하루에 얼마나 많은 홀을 소화할 수 있는지 홀로 도전해보기도 했다. 당시 함께 라운드했던 파트너는 아마추어인 신태화, 한용선이었다. 90홀을 소화한 이후 한용선은 더는 못 치겠다며 라운드를 그만뒀다. 그러나 한장상은 신용화는 113번째 홀까지 라운드를 이어나갔다. 더 치고 싶었지만 해가 졌기에 더 기록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침 6시에 출발해 백을 멘 캐디가 중간에 지쳐 4명이나 교체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만큼 한장상은 골프라는 스포츠에 진심이었다..

한해 1승 이상 거두며 연 ‘한장상 전성시대’
1958년 열렸던 제1회 한국오픈에서 7위를 했을 당시 최종 라운드에서 한장상은 자신의 베스트 스코어인 4오버파 76타를 쳤다. 이듬해 열린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도 다시 7위를 한 한장상은 1회 때보다 24타를 줄였다. 그리고 그 해 한국오픈에서 공동 3위를 도약했다. 첫 우승이 거의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국 1960년 한장상은 결국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프로골프선수권 2라운드에선 공식 대회 첫 언더파(3언더파 69타)를 치며 역사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4라운드 합계 7오버파 295타로 정상을 밟은 한장상. 그는 골프장을 기웃거리던 소년에서 불과 6년 만에 우승이라는 결실을 보며 서서히 전설을 써 내려갈 준비를 했다.
1962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른 한장상은 1964년 조태운을 비롯한 2위 그룹을 13타 차로 따돌리며 한국 오픈에서 우승하며 내셔널 타이틀을 따낸다. 이후 1967년까지 4년 연속 한국 오픈 정상을 차지했고, 또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년 연속 한국프로골프선수권, 1980년부터 1972년까지 3년 연속 한국 오픈 리더보드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국내와 해외에서 한해 1승 이상을 거두면서 그야말로 ‘한장상 전성시대’를 열었다.
골퍼로서 한장상의 가장 큰 장점은 ‘장타’다. 당시 퍼시몬 헤드와 스틸 샤프트의 드라이버로 290야드의 거리를 냈다. 당시 그는 1960년대 홍콩 오픈에서 열렸던 드라이버 샷 컨테스트에 출전해 283야드를 치며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장상은 당시 자신의 장타 비결로 어깨와 팔 힘을 꼽았다. “키가 큰 사람이 (장타에) 유리한 것이 사실이지요. 나는 키가 작지만, 어깨와 팔 힘이 누구보다 좋았습니다. 특히 팔씨름은 절대 지지 않았지요. 1970년대쯤인 것 같은데 홍콩 오픈을 끝내고 태국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대부분의 선수가 한 비행기를 탔었습니다. 그 비행기 안에서 팔씨름 대회가 열렸지요. 리그전으로, 내가 결승에서 노랑머리 선수를 이겼습니다. 동양 선수들이 누구보다도 좋아했고, 마침 그 비행기 스튜어디스가 한국인이었는데 샴페인을 터뜨려주었습니다.”

일본오픈에 우승하며 마스터스에 첫발
1972년 아시아의 톱스타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한 해였다. 그는 고기를 먹고 체한 상태에서 출전한 일본 오픈에서 4라운드 합계 10언더파 278타라는 최저타수로 우승했다. 연덕춘이 1941년 한국인으로 우승한 첫 대회이자 일본 내셔널 타이틀을 차지한 지 31년 후의 일이었다. 1972년 일본 오픈 이전 대회보다 당연히 위상이 더욱 높아진 대회였다. NHK가 첫 방송을 했고, 일본 수상이 우승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그는 일본의 ‘골프 영웅’ 점보 오자키를 1타차로 물리치고 정상에 올라 기쁨을 더했다. 그해 한장상은 한국오픈과 일본오픈이라는 양국의 내셔널 타이틀을 모두 획득하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고, 그랜드모나코 오픈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해외투어 2승의 업적을 세운다. 일본오픈 우승은 그에게 큰 선물도 안겨다 준다. 바로 마스터스 출전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마스터스 출전이었다. 1973년 그는 구즈와 국제오픈을 끝내고 도쿄에서 시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매니저나 전속 캐디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시카고에서 오거스타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는 일도 우여곡절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오거스타에 입성한 그는 리 트레비노와의 9홀 연습 라운드와 또 하루의 연습 라운드 이후 마스터스 첫날 5오버파 77타로 대회를 마쳤다. 한국 골프사에 영원히 남을 ‘마스터스 첫 라운드’라는 족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3오버파 75타를 기록하면서 2라운드 합계 8오버파로 1타 차로 컷 탈락하며 3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프로골프선수권 50회 연속 출전 ‘대기록’
1974년 이후 승수를 쌓지 못했던 한장성은 1978년 오란씨 오픈과 쾌남 오픈에서 우승한다. 특히, 1981년과 1982년에는 동해 오픈(현 신한동해오픈)의 원년과 2회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하면서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1982년에는 상금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아쉽게도 한장상은 1982년을 끝으로 더는 우승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기록은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기록은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 처음 출전한 후 2007년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으면서 동일 대회 50회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 지난 2004년 6월에는 프로 대회 1000회 출전이라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이는 실력 외에도 엄격한 자기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는 기록이다. ‘내게는 아직 못다 이룬 꿈이 하나 있다. 꿈의 무대 오거스타 내셔널에서 열리는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는 한국인 골퍼를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2003년 11월께 발간한 자서전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라는 책에서 ‘늙은 골퍼 삶의 마지막 꿈’이라는 제목의 후기에서 위와 같은 말은 남겼다. 
“아버지는 ‘자나 깨나 골프장에 가서 살아라’고 하셨고 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볼을 쳤습니다. 당시 비옷이라는 것도 귀해서 농민들이 입는 우비를 입고 빗속에서 볼을 쳤지요. 그리고 1960년대에 외국 대회에 출전하니 우리와는 스윙이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그때 사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보고 돌아와 흉내를 내기 시작했지요. 6개월 동안 스윙 교정하느라 고생도 했지만 결국은 내 것으로 만들었고, 그네들의 스윙은 우리와 달리 간단하더라고요. 모방하고 연구했고, 결국은 내 것으로 만들었지요.”

<박스 기사> 한장상이 남긴 기록들
1960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2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4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5년 한국 오픈 우승
1966년 한국 오픈 우승
1967년 한국 오픈 우승
1968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69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70년 한국 오픈,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71년 한국 오픈,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
1972년 일본 오픈, 한국 오픈, 그랜드모나코오픈 우승
1973년 구즈와 국제 오픈 우승
1978년 오란씨 오픈, 쾌남 오픈 우승
1981년 동해 오픈 우승
1982년 동해 오픈, 쾌남 오픈 우승
국내 19승, 해외 3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