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광남 회장이 인터뷰를 하며 밝은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낙천적이고 유쾌하며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넘치는
권광남 ㈜마쓰, ㈜남주개발 회장
권광남(73) 회장은 낙천적이고 유쾌한 성격이다. 얼굴에 웃음을 달고 다닌다. 어떤 일이든 겁내지 않는다. 한번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해내고야 만다. 용띠라서 그런지 추진력도 남다르다. 사업도 골프도 그랬다. 40년 이상 사업을 하면서 대한민국 기계공업 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이바지 해온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21년 사업체를 완전히 정리했다. 지금은 부동산 임대와 자영업을 하고 있다.
사업체 영업을 위해 39세에 시작한 골프는 어느덧 구력 34년이 됐다. 그동안 홀인원에 이글, 대회 우승까지 못해 본 것이 없다. 지금도 그는 드라이버 티샷으로 공을 200m 훌쩍 넘긴다. 아주 멋진 실내골프연습장도 만들고 경영한다. 그만큼 그는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넘친다.
취재 사진 김대진 편집국장 일부 사진 권광남 회장 제공
(권광남 회장이 라운드 전 기념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가 권 회장)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 싫어 29세에 독립해 금형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다
권경남 회장은 1979년, 29세 때 첫 사업을 시작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리에서다. 금형사업이었다.
“부친이 사업을 크게 하셨지요. 부친 밑에서 한 4년 있다가 혼자서 사업하겠다고 나왔어요. 부친 밑에서 일하기 싫어서 독립한 거지요. 조그만 공장을 찾아놓고 시작한 겁니다”
당시 국내 금형 산업은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기술을 수입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금형은 모든 제품에 필요한 아주 중요한 산업 분야였다. 그는 자체 기술을 개발했다. 그 덕에 삼성과 현대, 대우, 금성사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에 제품을 납품했다.
“처음 자본금 700만 원에 7명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3년만에 직원이 300명으로 늘어났어요. 급성장했지요.”
그는 영업맨을 자처한다. 누구보다 소질도 있다.
“제가 영업을 엄청 잘해요. 대한민국 일거리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지요”
사업 초기 한번은 경남 마산시(지금은 창원시) 한국중공업에 영업차 들렀다가 껌장수로 오해받아 쫓겨난 적도 있다.
“서른 살 무렵에 007가방을 들고 한국중공업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쫓겨났지요. 007가방을 들고 있으니 껌장수인 줄 알았나 봐요. 구매과장이 ‘나가시오’라고 소리쳐서 나왔지요”
그가 국내 최고의 금형을 만드는 사업체의 사장인 줄을 미처 몰라본 것이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중공업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제품이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아낸 한국중공업에서 ‘살려달라’고 찾아왔다. 결국 제품 납품이 이뤄졌고 이듬해는 한국중공업 사장의 공로패까지 받았다.
(권광남 회장과 부인 백정옥 여사)
“우리나라 기계공업 발전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28년 거래한 삼성과 LG의 2~3년 주기로 바뀌는 출세욕에 눈먼 임원진이 갑질을 너무 많이 해서 사업을 정리해 버렸어요”
권 회장은 1980년대까지는 기계공업, 전자와 자동차 부품 사업 등을 하다 1991년부터 전자 부품 사업에만 집중했다.
“1990년도까지는 대한민국의 모든 기계공업은 다했어요. 우리나라 기계공업 발전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하다. 한창 때는 국내는 물론 중국까지 누비고 다녔다. “한창 제조업을 할 때는 전국 8도를 다 돌아다녔어요. 국내에는 수원과 광주, 창원, 대구 등지에 공장이 있었고 중국 상해, 소주, 천진 등에도 공장을 두고 있었지요. 중국에서만 20년 가까이 사업을 했어요. 중국 기업들과 협력도 참 많이 했지요”
어려운 고비고비가 많았지만 사업은 괜찮았다. 그러다 갑자기 사업을 접었다. 왜 그랬을까.
“28년 거래한 삼성과 LG의 2~3년 주기로 바뀌는 출세욕에 눈먼 임원진이 갑질을 너무 많이 해서 사업을 정리해 버렸어요”
그의 명쾌한 답변이다.
당시 그는 냉장고와 에어컨 등에 들어가는 에어컴프레서를 만들어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납품하고 있었다.
그 스스로 “제조업에서 성공했는데 그 자리를 박찬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를 두고 최근 주위에선 자서전이라도 써야 되지 않느냐고 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주 성공했으면 쓰겠는데 도중에 정리를 해버렸기 때문에 쓰기도 뭐하다”면서 “지금은 성공한 것도 아니고 실패한 것도 아닌 진행 중”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아마 지나온 얘기를 쓰자면 대하소설 10권은 될 것”이라고 했다.
(권광남 회장이 사무실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지인의 권고로 영업을 위해 골프를 배웠다. 골프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를 사귀어 10년간 웬만한 골프장에 다 가봤다”
권 회장이 골프를 배운 사연도 재미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술로 영업을 했지요. 그런데 그때 지인이 ‘앞으로 그런 시대는 지나간다. 골프 시대가 온다. 5시간씩 라운드하며 얘기도 나누고 영업하는 시대가 반드시 온다’며 골프를 배우라고 권했어요”
그는 그 권유를 놓치지 않았다. 3개월간 인도어 골프연습장에 다니며 골프를 배운 뒤에 그 지인에게 그런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제는 필드에 나가야 한다. 필드에 나가려면 부킹(예약)을 해야되고 부킹은 어떻게 해야하는 지 등을 알려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골프장 부킹을 하려면 수 억 원이나 하는 골프장 회원권이 있어야 했다. 권 회장은 “그런 돈이 있으면 다른 것을 하지....”라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지인은 “그러면 백, 청와대 백 정도 있으면 된다. 그런 백이 없으면 서울 강남 뱅뱅사거리 논노패션 빌딩 5층에 가서 총무부장을 만나보라. 그 총무부장만 잡으면 대한민국 모든 골프장을 갈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007가방을 들고 그 곳에 찾아갔다.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찾아갔지요. ‘총무부장이 누구십니까’ 라고 물으니 마침 사무실 뒤편에 있던 분이 자신이 총무부장이라고 해서 그 분에게 가서 얘기를 했어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냐’고 묻길래 마침 ‘퇴근하실 시간인데 사무실 맞은편 버드나무집 식당에서 기다릴테니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를 하시죠’라고 하고 먼저 나가 식당에서 기다리니 그 분이 바로 왔어요. 그렇게 만나 식사하고 소주를 마시면서 새벽 3시까지 얘기를 나눴어요. 알고보니 그 분은 해병대 출신으로 저와 용띠 동갑이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친구가 되었지요”
그 친구는 대한민국 골프를 대표하는 공식 단체의 총무부장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 인근 유명 골프장 티(Tee) 리스트를 작성해 청와대와 정부 주요 부처에서 필요한 골프 부킹 업무를 해주고 있었다.
그는 그 친구에게 “나도 (부킹을) 해주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부터는 저에게도 리스트가 왔어요. 10년간 그 백으로 웬만한 골프장은 다 가봤어요. 한번은 은행지점장들을 데리고 안양베네스트에 갔던 적이 있어요. 그 분들이 ‘우리는 이런 데 못온다’며 놀라워 했던 적도 있지요. 지방 골프장엔 그 친구의 전화 한 통으로 모두 해결됐지요”
그런 고마운 친구가 안타깝게도 골프장 회원권 이권 개입 사건에 연루돼 6개월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그가 잡혀가자 권 회장은 “너가 들어가면 내 부킹은 누가 해주느냐. 가지마”라고 농담까지 했다.
“주말에 함께 골프 치러 가고 운동이 끝나면 술 한잔 먹는 것, 그게 그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자 낙이었다”고 권 회장은 술회했다.
그 친구는 유난히 덩치가 컸다. 체격이 좋으니 비거리도 엄청 났다. 공이 멀리 날아가니 오비(아웃 오브 바운즈)가 나서 알까기(자신이 친 공이 아닌 다른 공으로 친 공인 것처럼 속이는 것)를 자주 했다. 권 회장은 그럴 때마다 “알까기 하지마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그 후 운수업으로 전환해 새로운 길을 걸었다. 골프가 보기 싫다고 하면서...
(권광남 회장이 홀인원을 기념해 심은 나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홀인원 2회에 샷이글까지 한 골프마니아. “모든 것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홀인원을 한 번은 더 하고 죽을 것”
권 회장은 골프마니아다. 누구보다 골프를 좋아한다. 골프에는 늘 진심이다. 지금도 사무실에 골프백을 두 개나 두고 있다. 하나는 20년, 하나는 30년 넘는 골프채다.
한때는 좋은 친구를 만나 부킹 걱정 없이 유명 골프장을 거의 다녀봤지만 지금은 골프장 회원권도 여러 개 구입했다. 본인도 이용하지만 주위에서 필요하면 기꺼이 이용하도록 배려한다. 그는 사업을 할 때나 골프를 할 때나 늘 베푸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다.
권 회장은 지금껏 홀인원(Hole in one)을 두 번 했다. 한 번은 중국, 또 한 번은 국내에서다. 첫 번째는 2007년 중국 천진에서 사업상 필요해 골프장 회원권을 사고 라운드를 한 첫날 홀인원을 했다. 두 번째는 2013년 4월 21일 남춘천C.C.에서였다. 13번 파3(전장 163m), 내리막 홀. 티잉구역과 그린 사이에는 연못이 그린 전면과 오른쪽 옆을 감싸듯이 둘러싸고 있고 그린과 연못 경계 지점 사이에 길다란 벙커가 자리하고 있어 아마추어 골퍼들은 멘탈이 흔들리기 쉽다. 페어웨이가 없는 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날 따라 자신감이 넘쳤다. 왠지 예감이 좋았다.
“나 홀인원 할께”
약속하듯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그 약속이 지켜졌다.
그가 친 공은 20m나 넘게 굴러가 마치 빨려들어가듯 홀에 들어갔다. “160m나 되는 내리막 홀이라 공이 그린 에지(Edge)에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6번 아이언 클럽으로 쳤는데 손맛이 아주 좋았어요. 참 거짓말 같았지요. 앞 팀 5명과 우리 팀 5명이 모두 보는 가운데 환상적인 홀인원을 한 거예요”
그 기념으로 그는 그곳에 기념 식수도 했다.
그는 이글(Eagle)도 여러 번 했다. 샷이글을 할 때는 “샷이글을 할거야”라고 외치고 했다.
그의 베스트 스코어는 74타. 2000년도 클럽900(지금의 화순C.C.)에서다. 보기 2개에 나머지 16개 홀은 모두 파(Par)를 했다.
그는 “앞으로 홀인원을 한 번은 더 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권 회장은 요즘 주 1회 정도 필드에 나간다. 주변에 동료들이 많다. 과거 사업을 할 때 거래처나 금융계 인사들이다.
권 회장의 부인 백정옥 여사도 골프를 좋아한다. 부부 동반 라운드도 즐기고, 집안 골프 대회에서 여자부 우승한 적도 있다.
(권광남 회장이 받은 홀인원, 이글, 싱글 기념패와 트로피)
권 회장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잘 취하지 않은 술고래다. 아직까지 누구와도 술로 대적해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권 회장은 술고래다. 그 스스로 술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한다.
“아직까지 중국이나 한국에서 술로 나를 이긴 사람은 없다”
그의 얘기다. 그는 “중국에서 20년 안팎 사업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중국인들이 나만 보면 다 도망간다”고 했다.
지난 2021년 4월 30일에는 중국 사업을 접고 철수하기 전 송별회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술꾼과 술로 대적을 했는데 결국 그가 취해 쓰러지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다고 한다.
“한식집에서 바이주 20근을 먹는다는 사람이 내 옆에서 술로 내기를 하자고 해서 같이 마셨는데 결국 그 사람이 쓰러졌지요”
‘주량이 어느 정도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끝이 없다. 상대가 뻗을 때까지 마신다”고 했다.
“2, 30대 때는 (저의) 간이 특수했다. 양주 2병을 마시고 소주 1병을 입가심으로 먹고도 숙취란 걸 몰랐다. 음주 측정이 안된다”
그는 그만큼 술도 좋아한다. 술 좋아하고 영업 잘하는 그를 한 번은 그의 모친이 불렀다. 1980년대였다.
“내가 너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 워낙 네 멋대로 하고 사니까. 기왕에 소설을 쓰려면 베스트셀러가 되도록 써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여자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건 차마 어미로서 못쓰겠다”
(박옥금 시인)
권 회장의 모친 박옥금 여사는 빼어난 시조 시인이었다.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여류 시조 시인을 여럿 배출했다. 2003년 펴낸 ‘편지 삼국지’는 중앙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권 회장의 모친 박옥금(1927-2005) 여사는 빼어난 시조시인이었다. 1972년 시조집 ‘탑’을 간행하면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한 생 피는 뜻은’, ‘생활의 서’, ‘도농리 가는 길’, ‘저 하늘 끝에 살아도’, ‘은하의 가을 소식’, ‘가지산을 넘으며’ 등이 있고, 산문집 ‘여자의 강’,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 같은’과 편저 ‘한국여류시조문학 전집’이 있다.
가슴 속 기르는 이름 없는 새 한 마리
종일 붓을 들고 시가 되지 않는 날은
갇히어 파닥거리는 네 울음을 듣는다
콩닥콩닥 끼룩끼룩 이상한 울음소리
그리움에 눈이 멀어 아득한 내가 미워
하늘을 날고 싶다고 문을 열라 하는 새
새빨간 피를 뿜는 내 목숨의 나의 새야
끝내는 구만리 장천 네가 날아가는 날은
그날은 내가 죽어서 너를 따라 가리라
「박옥금 시인의 '새'-시조문학」(2001, 봄호)
그의 시조는 자신의 정한을 읊은 것으로 현대 시조의 특징인 전통성·현장성·회화성을 생활 시조로 살려 냈다.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직접 많은 여류 시조 시인을 배출해 현대 여류 시조계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에 시비 ‘설악산에 서서’(건립자 강태영)가 세워졌다. 활발한 문학 활동으로 한국시조문학상, 정운시조문학상, 노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화리조트 설악 쏘라노 정문 앞에 세워진 자신의 시비에 기대 선 박옥금 시인)
무엇보다 박 여사는 지난 2003년 ‘편지 삼국지’(문학과 청년. 570쪽)를 펴내 중앙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 76세였던 박 여사는 시조 제자이자 문하생인 강태영(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어머니) 여사에게 삼국지를 편지 형태로 써서 보냈고 그 글을 모아 책으로 냈던 것이다.
박 여사는 당시 “세상에 어느 누가 벗이 없을까마는 내게는 긴 세월을 성심껏 우정을 가꿔온 동무가 있어요. 벗이라기보다 큰 은인이기도 한데 그 분이 어느 날 제게 ‘조조· 유비· 제갈공명에 대해 알고 싶은데 얘기 좀 들려주세요’하시는 거예요. 그래 내가 ‘그 사람들을 알려면 삼국지를 대강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 부분과 줄거리를 요약해서 편지로 보낼테니 읽어보십시오’라고 했지요”
박 여사가 벗이라 부른 사람. 책에서 ‘아단(雅丹)이여’라고 쓴 사람은 바로 강태영 여사다. 30여년 전 한 시조 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은 동갑내기에 문학을 좋아하는 취향까지 비슷해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벗들 사이에서 ‘삼국지 박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삼국지’를 훤히 꿰고 있던 박 여사가 강 여사에게 편지를 통해 문학 강의를 한 셈이다.
편지는 한 통에 A4 용지를 빽빽하게 채운 대여섯장씩 써서, 일주일에 한 통꼴로 모두 41통을 보냈다.
박 여사는 벗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기분으로 붓을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시조비를 세워주고,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제 일처럼 마음을 써주던 동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편지 삼국지’는 모두 높임말로 썼다. 벗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그 애정 넘치는 편지는 쓰는 이나 받는 이 모두에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