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코노미 이성용 기자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가 그 땅의 주인이 된다.
필자(지이코노미 회장)가 오래전에 파리에서 에어프랑스(airfrance)를 타고 북극을 넘어 앵커리지에 내린 적이 있다. 가는 도중에 광활하게 넓고 얼어붙은 땅 알래스카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약 백 삼십년 전인 1867년에 소련이 미국에 이 땅을 팔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당시 720만불로 싸게 팔아 넘겼으니 지금은 소련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겠는가?
알래스카는 그때나 지금이나 군사 전략상으로도 요지일 뿐 아니라 기름 가스 등 각종 지하자원이 많이 묻혀 있다고 한다. 소련은 130년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그저 얼어붙은 볼품없는 땅인데다가 국경을 지키자니 군사들을 보내야 하는 등 귀찮게만 생각된 나머지 쉽사리 싸구려로 미국에 넘겼는데,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잘못했고 큰 실수였는가? 그들은 땅속 깊은 곳을 보지 못했고 먼 훗날의 일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본다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보여지느냐, 그리고 어떻게 보고 행동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본다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견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원리적으로만 보는 견해. 신뢰 가운데 보는 견해이다 ㆍ
첫째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견해이다. 정신세계는 물론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진리까지도 물질에 근거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그래서 사랑도 결국은 육체적 생식 본능의 발로 정도로만 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물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는지 알 수 없다.
둘째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원리적으로만 보는 견해이다.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그 어떤 원리가 있지 않겠는가 해서 작은 지식을 발동하여 그 지식의 척도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이다. 잘 아시는 대로 세상일이 어디 생각대로만 되어지는가?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하고 지극히 제한된 능력인데, 이것을 믿고 의존하고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겠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셋째는 신뢰 가운데 보는 견해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깊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상징적 견해를 가지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깊게 보고 멀리 본다. 신뢰 자는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는다. 서로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동부 뉴저지의 미국 프린스톤신학 대학에 가본 적이 있다. 학교 기숙사 바로 옆에 보면 아인슈타인 박사가 살던 집이 있다. 그 집 앞을 함께 지나가던 친구가 제게 아인슈타인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공부를 잘하지 못해 늘 낙제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적부에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이 성적표가 우리네 아들의 것이었다면 부모들은 울고 불면서 이제 망했다는 식으로 마치 다 끝난 것처럼 초상집 분위기를 연출하고 야단을 할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달랐다. 그런 성적표를 들고 온 자식을 붙들고는 "너는 다른 아이들과 같으려고 하면 열등생이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 다르려고 하면 너는 우등생이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한 면을 보았다.
아니, 자기 아들의 특수한 일면을 보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그 격려에 힘입어 그는 훗날에 아인슈타인 박사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유명한 박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는가? 자녀들의 성적표만 보지는 않았는가? 물론 성적도 중요하다. 그러나 학창 시절에 성적이 우수했던 사람들이 다 훌륭하게 된 것은 아니다. 공부 잘했다고 떠들던 사람들도 별것 아님을 본다. 이것은 남의 애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야 할까요? 보다 깊게 보다 멀리 보며, 그리고 크고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오늘 일어나는 사건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을 지성적으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신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종합적으로 보는 눈이 없다. 그래서 편견에 빠져 편견의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그 예로 사람들은 장님 코끼리 만진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경우를 본다. “장님들이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구경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코끼리 코를 만졌기에 코끼리가 뱀 같다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코끼리 다리를 만졌기에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말했으며, 또 한 사람은 귀를 만져 보았기에 코끼리는 부채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배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가 바람벽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사실 그들의 말은 다 맞기도 하고 다 틀리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순간의 편견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인 인식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객관적인 말 자체도 주관적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주관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우리는 바른 사관(史觀)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미래 지향적이요 소망 지향적인 안목으로 사물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요즘 한국경제 어렵다. 한국교육 어둡다 다음 세대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때 우리는 큰 안목을 가지고 내일을 보고 나라를 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만 보더라도 걱정되는 점이 보인다. 멀리 보지 못하여 지도자가 오늘 당장 몇 사람에게 지지를 받기 위해 아첨을 하고, 오늘 당장 몇 사람에게 지지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 신경을 쓰는 인사들을 종종 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른길. 참 교육의 길은 외롭다. 중요한 결정은 고독하게 혼자 결정해야 한다. 당장 보기에는 잘못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먼 훗날 역사가들이 판단해 줄 것이고, 백성이 판단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백성들의 눈치만 보고 무슨 정치를 하겠는가?
여론에 이리저리 밀려다녀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몇 프로가 지지하고 몇 프로가 반대한다는 그 비율에 의지해서 바른 정치를 할수 있느냐 말이다.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낙천적인 생각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전부 망했느니 흥했느니 하고 벌벌 떠는 사람들로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천적이며 참, 성실한 편에서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신뢰해야 한다. 무엇이든 신뢰 가운데 보고, 신뢰 가운데 생각하고. 서로 신뢰하면서 현실을 이해하고, 자신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역사는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