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호텔은 1914년 만철에 의해 환구단의 일부를 헐고, 그 부지 위에 4층 69개 객실 규모로 근대식 건축물을 세워 ‘조선경성철도호텔’이라고 불렸다.
효창원 골프코스는 1917년경부터 만철 주도로 당시 한국내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기획되었고, 1918년 5월에야 골프장 설립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전세계를 강타한 스페인 독감 팬데믹 때문에 골프장 건설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1월 30일자 「매일신보」를 보면, 1918년 10월부터 ‘악성 감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1월까지 4개월 동안 14여만 명이 사망한 대재앙이 덮쳤고, 3) 3.1운동 이후 긴장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골프장 공사는 9월경에 가서야 착공됐다.
“나는 1919년 5월 만주철도주식회사의 초청으로 처음 경성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조선호텔 지배인 이노하라(猪原貞雄)는 골퍼는 아니었지만, 내가 경성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골프코스에 필요한 모든 토지를 마련한 뒤였고, 9홀의 설계만 하면 되는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단지 티잉 그라운드와 벙커, 그리고 그린 위치만 정해 주면 족할 정도로 설계가 되어 있었다. 송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무성한 효창원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울창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 페어웨이를 만들어 코스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효창원은 묘가 산재해 있어 묘를 치워버리면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지만 조선인들이 절대로 달갑게 여기지를 않았다. 코스를 만드는데 여러 가지 애로가 뒤따랐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코스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하여 조심성 있게 다루었다.” 5)
효창원 골프코스 설계자인 던트의 회고록이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73년 간행된 『한국골프총람』에서 ‘H.E.댄트의 수기’(『총람』에서는 던트를 댄트로 표기)를 통해서였다. 『총람』에서 편집자 주로 언급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 글을 쓰던 중 귀중한 자료를 입수하게 되어 수록한다. 1919년 5월 효창원코스를 설계한 댄트(H.E.Dannt) 씨의 수기를 얻게 되어 그 당시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얻게 되었다. 이 수기는 댄트 씨가 1923년 간행된 『록고장(六甲山)과 다른 山들, 그리고 시골이야기』(원제=Inaka or Reminiscences of Rokksan and other Roks)라는 책 속에 수록된 것이다...댄트 씨는 그의 책 속에 「은자들의 왕국 안에서의 골프」(원제=Golf in the Hermit Kingdom)라 제(題)하여 효창원코스 설계 당시와 그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6)
“3번홀 :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홀은 효창원 코스 중에서 최고의 명당, 그래서 코스의 이름도 ‘알프스’로 불렀다. 코스 주변엔 낭랑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무성한 나무 사이로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상쾌함, 그리고 한 눈에 남산 중턱에 있는 성벽이 송림 사이로 보여 그 경치는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 이 홀은 200야드, 도그레그 코스지만 방향만 정확하면 파(Par)나 보기(Bogey)를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코스 왼쪽에는 길다란 봉우리가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조선 최초의 이 골프코스는 요철이 있는 토지 위에 만들어졌다.(밑줄 필자) 조선반도의 산들은 모두가 미신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용’이라든가 또는 무엇인가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산길에는 성황당이 있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나 나그네들은 그곳에서 ‘무사 안녕’을 비는 풍습이 남아 있다.” 7)
1973년 간행된 『한국골프총람』에서도 ‘원산해관 골프코스’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곳은 단지 개인적인(privite) 골프코스일 뿐이라고 평가하였다. 1921년 6월 1일 개장한 효창원 골프장이야말로 한국골프의 효시라 할 만 하다는 것이다. 9)
효창원 골프장은 남대문에서 자동차로 3, 4분 거리였고, 골프장 근처를 산책하는 시민이나 주변 행인들과 골퍼들 사이에 충돌이 빈번했다고 한다. 당시 천주교 신학교 학생이던 노기남 대주교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다니던 신학교가 ‘원효로’에 소재했는데, 방과 후에는 가끔 효창원에 산책 나갔다가 골프장 밖으로 날아온 골프공 때문에 생기는 골퍼 또는 캐디와 행인과의 사이에 생기는 마찰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한다. 11)
그동안 골프를 모르던 한국 상류층도 사교활동을 위한 오락적 근대 스포츠로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당시 효창원 골프장을 찾는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골퍼는 시즌 때 휴일에 7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총독부 고위 관료를 비롯한 경제계 명사들은 일요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라운드를 즐겼다. 당시 경성 상류층의 스포츠인 골프를 모르는 사람은 신사의 자격으로 부족하다고 평가될 만큼 골프에 대한 인기가 높았고, 그러다 보니 남산 일대의 여러 일류 요정에서는 파리를 날리곤 했다는 풍문도 돌았다고 한다. 13)
또한 일부 자료에는 심지어 ‘제대로 된 골프웨어나 골프화가 없어 짚신 같은 것을 신고 웃통을 벗어 제치고 플레이 했다’고 주장되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당시 사진 자료들을 보면 골퍼들의 모습이기 보다는 캐디들의 모습이 일부 과장되고 폄하된 주장인 듯하다.
우리에게 『조선골프소사』(1940년) 필자로 알려진 다카하다(高?種夫)는 효창원 골프장의 모습을 ‘특히 한 여름 오후 소나기 후에는 매미 우는 소리가 귀에 따가웠고 골짜기 개천에 흐르는 많지 않은 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수락석출(水落石出)의 경지는 가히 선경(仙境)이었다고’ 언급하면서, 당시 효창원 골프코스에서 라운드 하는 것은 단연코 사치스러운 한량들의 놀이였다고 자평했다. 16)
또한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은 윤호병과 연덕춘의 기억에 따르면 샌드그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동일은행 간부였던 윤호병은 청량리 골프장에서 처음 골프를 시작했고 군자리 골프장에서도 라운드를 한 초창기 골퍼였다. 연덕춘 프로는 군자리 골프장 근처에서 살았던 관계로 캐디 일을 하다가 한국의 원조 프로골퍼가 되었다. 17)
지금 생각하면, 한국 골프 요람기에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은 엇박자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골퍼 중심으로 골프코스가 만들어지고 골프클럽이 조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은 식민지 독재 상황에서 만철 부속 호텔의 투숙객 서비스와 외국인 관광객 유인책을 위한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 관변 주도로 만들어진 특이한 과정을 겪게 된다.
어쩌면, 일찍이 <한국골프총람>에서 의미 부여된 것처럼 ‘한국에서 골프의 싹이 자라도록 해준 씨앗을 뿌린 골프장’을 만든 일제 통치기구가 그들의 의도에 따라 근대적 스포츠라 할 수 있는 골프를 한국 상류층에게 고착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