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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 킹’ 필 미켈슨을 위한 변명

이번 3월호 특집의 주제는 ‘빌런’이다. 메인 주제를 빌런으로 잡다보니 생각나는 인물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바로 필 미켈슨이다. 필은 다수가 아닌 소수파의 대장으로 타이거 우즈나 로리 매킬로이를 제치고 골프계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1위’에 올랐다.

 

‘사상 최고의 2인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어있는 미켈슨에게 이번 ‘1위’는 어쩌면 그가 평생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현골프계에서가장큰영향력을행사하고있는필미켈슨, 그는대체언제부터‘빌런킹’의길을걷게된것일까. 여기 어둠의 ‘필사모(필 미켈슨을 사랑하는 모임’인 에디터가 필 미켈슨을 위한 변명을 해보기로 했다.

 

EDITOR 방제일 
 

필 미켈슨은 태생부터 스타가 될 자질을 타고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생긴 백인에 훤칠한 외모와 키, 거기에 남들과 다른 왼손잡이 골퍼라는 화제성까지. 골프 스타일 도저돌적이다.

 

미켈슨은 그야말로 핀만 보고치는 골퍼다. 트러블 샷이 그래서 많다. 트러블 샷을 잘치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필이 그랬다.

필 미켈슨은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집에서 자란다. 골프를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쉽게 골프를 접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왼손 골퍼의 대명사인 필은 오른손잡이다. 그는 아버지의 스윙을 맞은 편에서 따라 하다 왼손으로 골프를 치게 됐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고치려 했지만,왼손 골퍼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대로 ‘왼손 골퍼’로 냅뒀다.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미켈슨의 아버지는 비행기 조종사였는데 근무 일정에 따라 일주일중여러번함께골프를할수있는여건이되었고, 집뒷마당에있는광범위한연습공간을통해 어린 미켈슨은 아버지와 함께 골프를 즐기며 창의적인 숏게임을 연마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 입학한 미켈슨은 졸업할 때까지,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로 손꼽히며 대활약한다.

1991년 1월, 미켈슨은 대학생의 신분으로 골퍼로서 처음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 투산에서 개최 된 PGA 투어 대회 ‘Northern Telecom Open’에서 아마추 어 신분으로 우승을 한 것이다. 이는 1985년도에 더그 샌더 스가이룬 후 6년만에 이룬 업적이다.

 

무엇보다 미켈슨 이후 PGA 투어에서 우승한 아마추어가 없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을 달성했음을 의미한다.

 

이 위업을 통해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 초대됐다. 여기서 그는 아마추어 중 최저타를 기록하며 ‘실버 컵’을 수상했다.  더 이상 아마추어 무대에선 이룰 것이 없음을 느낀 미켈슨은 투어 프로로 전향한다. 투어 우승을 일찌감치 이룬 덕에, Q스쿨을 면제 받아 1992년부터 PGA 투어에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한 필미켈슨.

 

그는 첫 해에는 투어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듬해인 1993년 뷰익 인비테이셔널 오브 캘리포니아 우승을 시작으로 1993년 2승, 1994년 1승, 1995년 1승 등 꾸준히 승을 쌓더니 1996년에는 4승으로 다승 1위와 상금 2위 등을 거두며 투어의 간판이자 미래가 된다. 1

 

996년 필 의4승이매우상징적인게그해투어에는앞으로 필의 인생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인물이 나타난 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타이거 우즈다. 이후 투어에서 필은 꾸준히 승수를 쌓는다.

 

호쾌하고 저돌적인 플레이에 팬 서비스까지 좋았 던미켈슨은 그야말로 ‘투어의미래’나 다름없었다.투어의 미래여야 할 미켈슨에게도 고충이 있었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해 ‘무관의 제왕’ 취급받았던 것이다.

 

1998년까지 메이저 대회 TOP3가 최고 성적이었던 미켈슨에게, 1999년 US Open은 첫 메이저 등극의 최고 기회였다. 그러 나 페인 스튜어트에게 불의의 일격을 맞으며 또다시 메이 저대회우승앞에서좌절한다.페인스튜어트는복수할기 회조차 미켈슨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듬해 비행기 사고 로페인스튜어트가숨졌기때문이다.이때부터 언론은 미켈슨에게 ‘2인자’라는 낙인을 서서히 찍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즈의 활약도 한몫했다. 1992년 데뷔해 투어에서 10년 넘는 기간 동안 21승을 거둔 필 미켈슨이었 지만 메이저 대회 우승 타이틀이 없었다. 미켈슨보다 4년 이나 늦게 데뷔하고도 같은 시점에 메이저 8승을 비롯, 39 승이나 거둔 타이거 우즈에게 모든 명예와 인기를 내줬다. 이때쯤 언론은 필미켈슨에게“메이저대회에서우승하지 못하는 최고의 골퍼”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이 혹평에 미켈슨은 2003년 상금 순위 38위까지 떨어지며 커리어 최악 시 즌을 보냈다.

 

이후 미켈슨은 절치부심을 통해 메이저대회 에서 우승도 하고 ‘사상 최고의 2인자’라는 별명에 걸맞은 커리어를 쌓는다. 그러나 필의 자존심은 자신이 ‘2인자’에 머물러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프로에까지 진출한 선수들 중 승부욕이 약한 선수야 없겠지만은 필 미켈슨은 그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했다.

 

언제나 자신이 틀릴리 없고, 그동안 큰 부진에도 항상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우뚝 섰던 필에게 ‘타이거 우즈’는 넘어야 할 벽이었다.

 

그러나 미켈슨은 PGA 투어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다. 주식 투자에 얽히기도 하고, 각종 구설에 오른다.

 

그때 쯤 필미켈슨은 깨닫지 않았을까. 자신은 PGA 투어에서 더 이상 ‘왕’이 될 수없다는 사실을.

 

여기에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리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필에게 검은 유혹이 다가온다. 리브 골프란 이름의 거부할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이 그를 사로잡는다. 악마와 손 잡는 것이라는걸 모르는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거절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 미켈슨은 그 악마와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사상 최고의 2인자’라고 자신에게 말하던 이들을 위해 ‘빌런’이 되기를 자처한다. 30여 년간의 투어 프로로 살면서 깨달은 것이다. 이 투어의 세계에는 언제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는것을 말이다.

 

그는 더욱 더 짙은 그림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타이거우즈의 낮이 빛나는건 미켈슨의 밤이 그만큼 어둡기 때문이다.

 

미켈슨은 영원한 2인자에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배신’이라 말한다. 아니다. 배신도 뭣도 아니다. 그저 미켈슨은 자신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든 가장 매력적인 빌런은 대의를 가진 빌런이다. 미켈슨에게는 미켈슨만의 대의가 있다.

 

그 대의가 남들에게 그저 '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보이는지 따위는 이제 미켈슨에게 상관없는지 모른다. 그는 그저 그의 골프를, 그의 길을 걸을 뿐이다. 그것은 필 미켈슨이라는 ‘골퍼’가 지금까지 투어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자, 필 미켈슨이란 남자가 살아 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