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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골퍼라는 직업을 만들어 낸 최초의 골퍼 〈월터 하겐〉 (하)

룰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스물한 살에 US 오픈 챔피언에 오르고, 메이저 11승을 달성한 천재. 토종 미국인 최초로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에 오른 인물이자 프로 골퍼의 클럽하우스 출입 금지라는 차별 제도를 고쳐버린, 골프 역사를 만든 주인공. 시간 당 10센트짜리 캐디로 시작해 최초로 100만 달러 수입을 돌파한 골프계 자수성가의 표본.

 

이 모든 수식어가 ‘프로골퍼’라는 직업을 만들어 낸 최초의 골퍼, 월터 하겐에 대한 것이다. 그를 알아야 진정 프로골프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그런 하겐의 첫발, 그 위대한 앞길을 막을 뻔한 갑각류가 있었으니, 바로 랍스터다. 

 

생애 첫 랍스터, 프로먹방러가 된 하겐
1914년, 월터 하겐은 드디어 US 오픈에 출전하게 된다. 예선 36홀을 5위로 통과해 본선 진출이 확정되던 날 밤, 월터는 친구 더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시카고 시내로 나갔다. 랍스터와 굴을 파는 식당을 발견한 두 사람. 생애 처음으로 랍스터를 먹기로 한다.


배가 터지도록 랍스터를 먹고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 월터는 그러나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복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친구 더치가 호텔 의사를 찾아 식중독 약을 구해왔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튿날 시작되는 본선 36홀 경기에 참가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증상은 심각했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1914년 US 오픈 본선 첫날 당시 월터를 곤욕에 빠뜨렸던 복통은 식중독이 아니라 과식에 의한 것이었다.


첫 홀의 중요성
잘하던 야구 대신 다시 잡은 골프채였고, 클럽 멤버인 윌라드의 후원과 지지를 받아 나온 US 오픈이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침이 밝았다. 복통은 여전했지만, 의사가 가져온 우유와 아스피린을 먹고 티오프 시간에 맞춰서 골프장으로 나갔다.


1번 홀부터가 난관이었다. 연못을 넘기는 티샷을 구사해야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혼신을 담아 휘두른 티샷은 다행히도 물을 겨우 넘어갔다. 그리고 찾아온 두 번째 샷. 러프에서 친 샷이 그린 근처까지 굴러갔고, 월터는 첫 홀을 파로 마무리했다.


아프니까 선두다
이후로도 월터의 샷들은 일명 ‘와이파이’로 날며 오른쪽, 왼쪽 러프로 떨어졌다. 그런데 위기 때마다 월터의 묘기 같은 세이브가 이어지는 게 아닌가.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홀을 한 번의 퍼트로 마무리하는 기염을 토한 월터.


복통을 앓으면서 돈 18홀을 마치고 그는 68타를 써냈고, 이는 코스 신기록이었다. 선두임은 말할 것도 없고.


골프가 잘 됐기 때문이었을까? 그를 괴롭히던 복통이 차츰 잦아들었다. 하긴 이 정도로 신명나게 골프를 치면 없던 기운도 날 것 같긴 하다.


이어진 오후 라운드에서 월터는 74타로 부진했지만, 여전히 선두는 지켰다. 다만 맥나마라가 1타 차, 위멧이 3타 차로 바싹 따라붙고 있어 우승을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그…거기 혹시 무슨 일이오?”
다음날 3라운드에서 월터는 75타로 좀 더 부진했다. 다행히 경쟁 선수들도 함께 부진해 또다시 선두를 지켰다. 이때 베테랑 아마추어 칙 에반스가 3타 차로 2위까지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열린 US오픈이었던 만큼 갤러리들의 관심과 응원이 시카고 출신의 에반스에게 몰렸고, 기대에 부응하듯 마지막 라운드 9홀이 끝났을 때 월터의 리드는 1타 차로 줄어들었다.


리더 보드가 없었던 시절이라 3홀 뒤에서 따라오는 에반스의 스코어를 알 수가 없었고, 월터의 귓가에 갤러리의 함성이 들려올 때마다 21세의 어린 골퍼의 마음에는 긴장감이 쌓여갔다.


퍼트는 Money
15번 홀에서 4미터짜리 파 퍼트를, 18번 홀에서 3미터짜리 버디 퍼트를 침착하게 성공시킨 월터는 총 290타를 기록했다. 이 정도면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성적이었다. 남은 건 16, 17, 18번 홀을 남겨둔 에반스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실 에반스의 이날 경기는 오히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위태했다. 9번 홀 1미터짜리 버디퍼트를 놓치면서 12번 홀에서는 3퍼트를 범하는 등 부진한 퍼트에 발목이 잡혔다.

 

월터가 들은 함성은 부진하던 에반스가 17번 홀에서 가까스로 버디를 잡아 나온 간만의 함성이었다. 결국, 에반스는 월터와의 1타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2위를 기록하게 된다.


월터의 메이저 11승 중 첫 번째 우승이자, 그의 생애 첫 프로대회 우승이었다. 그는 우승 상금 300달러를 들고 ‘금의환향’하게 된다.

 

최강의 아마추어, 칙 에반스

1916년 US 오픈 우승자는 ‘최고의 아마추어’ 중 하나인 칙 에반스였다. 그는 같은 해 US 아마추어에서도 우승해 프로와 아마추어 대회를 한 해에 석권한 최초의 골퍼가 됐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4년간 US 오픈에서 아마추어의 우승은 3번이나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당시의 아마추어 골퍼들의 실력과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골프에 올인하다
스물한 살 약관의 나이에 무려 US 오픈을 제패하고 돌아온 영웅이자 챔피언이 됐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프로샵에서 월터를 기다리는 건 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밀려있던 일거리들이었다.


그래도 US 오픈 챔피언이라는 성과를 얻고 돌아온 월터는 드디어 야구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렸다. 마음먹고 골프에 몰입했다. 스윙 테크닉을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연습했고, 골프 룰 공부도 철저하게 했다.

 

물론 대부분의 룰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투어 선수로 활동하려면 룰에 대한 건 완벽하게 알아야 스스로 보호하고,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시작된 꽃길
US 오픈에서의 우승은 월터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우승 상금 300달러는 당시 큰 금액이었고, 광고와 시범 경기 등 부수적인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장 스팔딩 사(社)와 골프공 사용 계약이 성사됐다. 술과 담배 회사에서도 제안이 들어왔지만, 아직 술과 담배를 시작하지 않았던 월터 하겐이라 이 광고 계약은 거절했다.


소속 클럽인 로체스터CC에서의 대우도 좋아졌다. 자세한 계약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첫 우승 이후로도 4년이나 머문 것으로 보면 만족할 수준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멋쟁이’ 월터 하겐의 태동
1915년. 월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공식 프로대회(파나마-퍼시픽 익스포지션 토너먼트)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해 US 오픈의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월터에게 우승 상금이 1천 달러를 넘는 대회는 처음이었다. US 오픈의 3배를 뛰어넘는 상금을 받은 월터는 드디어 패션왕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저축은커녕 사치스러운 과시욕을 보이며 외모를 가꾸는데 투자했다. 어릴 적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클럽 멤버들의 ‘수준’을 따라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1915년 US 오픈 성적은 좋지 않았다. 미국의 아마추어 제리 트래버스가 우승하면서 5년 연속 미국인 우승자가 나왔지만, 월터는 8위에 그쳤고 6.25달러의 조촐한 상금을 받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골프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 행사의 규모가 위축된 결과였다. 미국 프로골프 대회도 축소되거나 취소됐다. 미국은 1917년, 1918년 US 오픈을 취소했고, 영국에서는 1915년부터 1919년 사이의 브리티시 오픈을 취소했다.

 


지금은 “프로님”, 1916년에는 “헤이 보이?”
1916년, 프로골퍼의 대우와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들 얻기 시작했다. 프로들은 골프클럽에서 일하며 클럽 멤버보다 아래 계층의 ‘고용자’ 정도로 인식됐던 시기였고, 캐디를 부를 때 쓰는 단어인 ‘보이’로 불리기도 했다.


아마추어 선수들은 거의 모두 부유층의 자제들이었기에 멤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클럽하우스 출입도 자유로웠지만, 정작 프로들은 골프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는 이유로 천대받았다. US 오픈 챔피언이 되어 돌아온 하겐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선망은 선망일 뿐 ‘그들 중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월터는 멤버들의 후원과 지지는 받아도 모임에 초대받지는 못했다.


2023년 현재의 관점으로는 얼핏 ‘문장을 잘못 쓴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와닿지 않겠지만. 그 시절 프로 선수가 현대의 프로골퍼가 가진 위상을 안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제1회 PGA 챔피언십은 10월 뉴욕의 시와노이CC에서 열렸고, 월터는 준결승 매치에서 탈락했다. 결승에서 짐 반스와 조크 허치슨이 맞붙었고, 결국 반스가 우승해 상금 500달러와 워너메이커 컵을 들어 올렸다. PGA 챔피언십의 매치 플레이 방식은 1957년까지 이어졌고, 1958년부터는 스트로크 플레이로 변경됐다.

 

1916년 PGA의 탄생
그러던 중 계기가 만들어졌다. 필라델피아 백화점의 오너인 로드먼 워너메이커가 월터 하겐을 비롯한 유명 프로들을 모아 회의를 열더니 PGA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USGA는 PGA의 설립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결국 프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USGA는 아마추어 골프대회와 US 오픈을 주관하고, 모든 프로대회는 PGA가 주관하게 됐다. PGA는 워너메이커의 기부금으로 총상금 2,850달러의 ‘PGA 챔피언십’을 공식 대회로 개최하기 시작했다.


상금 규모가 US 오픈의 두 배를 넘는 데다 우승컵인 ‘워너메이커 트로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자 하는 프로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명실상부한 ‘메이저 대회’가 창설된 것이다.


PGA는 시합 방식에서 US 오픈이나 브리티시 오픈과 차별화하기 위해 ‘매치 플레이 방식’을 채택했다.

 

가장 무거운 우승 트로피, 워너메이커

PGA 투어에는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우승 트로피가 있다. ‘어깨가 무겁다’고 할 때의 무게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진짜 무거운 트로피다. 물론 트로피에 담긴 역사도 101년으로 깊다. PGA투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 ‘워너메이커’ 얘기다.
이 트로피는 71㎝의 높이에 무게가 무려 12.3㎏이다. 실제로는 원본과 같은 크기의 모조품을 특수 제작해 수여하는데 모조품의 무게는 19㎏에 달한다. 진품은 현재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루시의 PGA 역사박물관에 전시돼있다.
2008년 우승자인 패드릭 해링턴(아일랜드)은 “이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골프 실력보다 막강한 팔 힘이 먼저 필요하다”며 농담을 할 정도였다. 워너메이커는 PGA 챔피언십의 창시자 로드먼 워너메이커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


“나는 백만장자가 될 거야”
1916년 US 오픈에서 하겐은 다시 한번 실망스러운 7위를 기록했다. US 오픈에서는 부진했지만, 메트로폴리탄 오픈과 쇼니 오픈, 당시 메이저 대회로 인정받았던 웨스턴 오픈에서 우승을 거두며 건재함을 과시한 하겐은 프로골퍼 사상 최초로 ‘총수입 100만 달러 돌파’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다.


1917년 하겐은 상류사회 집안의 영애인 마가렛 존슨과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인 월터 하겐 주니어를 낳는다.


그해 여름에는 디트로이트에 건설 중인 ‘오클랜드 힐스CC’의 헤드 프로 제안을 받는 겹경사가 그에게 찾아왔다. 연봉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골프대회 참가를 클럽에서 적극 후원해준다는 조건이 마음에 쏙 들었다. 25세의 하겐은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본격적인 투어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다
디트로이트에 정착한 하겐은 드디어 상류사회의 멤버들과 쉽게 어울렸다. 이때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시범 경기로 돈을 벌었다. 당시 프로대회의 상금 규모로는 PGA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싹쓸이해도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울 정도였기에 시범 경기 수입은 필수였다.
하겐은 타고난 쇼맨십을 가진 매력적인 골퍼였다. 어디서든 한눈에 알아볼 카리스마를 고급진 복장으로 치장까지 했으니 어딜 가든 인기가 높았다.
특히 다소 어려워 보이는 지역에서의 샷을 할 때면, 사실 그에게는 간단한 샷이더라도, 일부러 시간을 끌며 탈출 방법을 모색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연출한 후 쉽게 멋진 샷을 날려 관중을 환호하게 만드는 타입으로 스타성도 다분했다.

 


골프는 장갑 벗기 전까진 모르는 법
1919년 US 오픈은 보스턴의 브레이번 골프 클럽에서 열렸다. 3라운드가 끝났을 때 하겐은 226타로 보스턴의 로컬프로인 마이크 브레이디에게 5타 뒤지고 있었다.

 

홈게임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5타를 역전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골프는 장갑 벗을 때까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골프의 신이 하겐에게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하겐은 75타를, 브레이디는 80타를 치고 만다. 두 선수는 301타로 공동 선두가 됐고, 승부는 다음날 18홀 플레이로 결정하게 됐다.


시합이 끝난 후 브레이디는 집으로 돌아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의 하겐은 친구들과 밤새 파티를 하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파티에 참석한 친구가 “브레이디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며 걱정하자 월터는 호탕하게 웃었다.


“잔다고? 침대에 누워있을 뿐 잠을 못 이루고 있을 게 틀림없네. 기왕 그럴 바에야 이렇게 파티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2번째 US오픈 우승. 이게 마지막일 줄은
다음날 코스에 나타난 하겐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지만, 첫 티샷은 페어웨이 가운데를 가르고 날아갔다.

 

그렇게 하겐은 10번 홀까지 2타를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11번 홀에서 경기위원이 다가왔다. “홀 가까운 지점의 공 근처에 있던 나뭇잎을 치우는 과정에서 룰을 위반했기 때문에 2벌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룰 공부를 철저히 했던 하겐은 이 판정에 불복해 심판과 논란을 벌였다. 이때 갤러리 중 한 사람이 “브레이디도 9번 홀 근처에서 돌을 치우면서 룰을 위반했다”고 제보했다.

 

경기위원이 본인에게 확인해보니 브레이디는 2벌타 부과에 순순히 동의하겠다는 게 아닌가.

 

이를 본 하겐은 “그럼 나도 2벌타를 받아들이겠다”고 동의했다. 브레이디의 벌타로 우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7번 홀(파3)에서 다시 한번 ‘사건’이 일어났다. 하겐의 티샷이 벙커에 박혔는데 공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브레이디가 희미하게 보이는 공의 일부를 찾아냈다. 하겐은 “갤러리 중 한 사람이 발로 밟지 않고서야 이렇게 박힐 수는 없다”고 항의했으나 경기위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하겐의 ‘완벽한 룰 숙지’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그는 “이 공이 정말 내 것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샷을 한 뒤에는 자기 공이 아닌지 밝혀지면 2타의 벌타를 받아야 하니 경기위원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겐은 공을 집어서 자기 공임을 확인하고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모든 절차가 룰에 의해 진행됐지만, 공은 반쯤 보이는 상태가 됐다. 하겐은 공을 쳐 벙커로 내려오게 하고는 벙커 샷을 쳐 더블보기로 그 홀을 막아냈다. 마침 브레이디도 보기를 범해 마지막 18번 홀을 남겨두고 하겐은 여전히 1타 차 앞서고 있었다.


18번 홀 결과 두 선수 모두 파를 기록했고, 스물여섯 살의 하겐은 77타로 두 번째 US 오픈 우승을 차지하며 상금 500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마지막 US 오픈 우승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최초의 ‘프로골퍼’가 되다
2번째 US 오픈 우승 후 하겐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였던 브레이디와 함께 디트로이트로 돌아왔다.

 

오클랜드 힐스에서의 환영 만찬에서 하겐은 헤드 프로 자리에서 사임하겠다고 발표하며, 후임자로 함께 온 브레이디를 추천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멤버들이 당황했지만, 그를 후임자로 고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하겐은 드디어 ‘자유의 몸’이자 ‘진정한’ 프로 골퍼가 됐다. 골프 샵을 운영하거나 레슨을 할 필요도 없고 자기 능력과 실력에 따라 오로지 ‘플레이’만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프로 골퍼가 된 것이다. 이 순간부터 하겐은 골프 프로가 아닌, 프로골퍼라는 ‘직업’을 가진 최초의 골퍼가 됐다.

 

(골프가이드 5월호 '월터 하겐, 남은 이야기' 편에서 계속)

 

자료 〈더 멀리 더 가까이〉 도서출판 충영, 박노승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