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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골퍼라는 직업을 만들어 낸 최초의 골퍼 〈월터 하겐〉 남은 이야기

월터 하겐을 알아야 진정 프로골프의 역사를 아는 것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지난 상·하 편을 통해 월터 하겐이 어떻게 ‘프로골퍼’라는 직업을 만들어 낸 최초의 골퍼가 됐는지, 그의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정작 하겐의 화려한 경력은 그때부터 시작이었기에, ‘월터 하겐’ 편의 남은 이야기를 좀 더 소개한다.

 

월터 하겐

메이저 우승 11회
US 오픈 2회(1914, 1919)
디 오픈 4회(1922, 1924, 1928, 1929)
PGA챔피언십 5회(1921, 1924, 1925, 1926, 1927)
PGA투어 우승 45회, 이외 우승 30회
라이더 컵 선수 5회, 캡틴 6회
1974년 명예의 전당 창립 회원 입회

 

최초의 ‘프로골퍼’가 되다
2번째 US 오픈 우승 후 하겐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였던 브레이디와 함께 디트로이트로 돌아왔다. 오클랜드 힐스에서의 환영 만찬에서 하겐은 “헤드 프로 자리에서 사임하겠다”고 발표하며, 당시 동행했던 브레이디를 후임자로 추천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멤버들은 당황했지만, 결국 브레이디를 후임자로 고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하겐은 드디어 ‘자유의 몸’이자 ‘진정한’ 프로 골퍼가 됐다. 골프 샵을 운영하거나 레슨을 할 필요도 없고 자기 능력과 실력에 따라 오로지 ‘플레이’만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프로 골퍼가 된 것이다. 이 순간부터 하겐은 골프 프로가 아닌, 프로골퍼라는 ‘직업’을 가진 최초의 골퍼가 됐다.

 

셀럽 걱정은 뭐?

프로골퍼가 된 하겐의 목표는 이제 프로대회의 우승, 상금 확보와 함께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기’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1919년 그가 2번째 US 오픈 우승을 달성하자 미디어는 첫 우승 때보다 더 크게 보도했고, 하겐은 ‘미국 최고의 골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소위 인플루언서가 되니 광고 수입도 자연스레 나날이 높아졌다.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는 통에 해당 광고 모델은 거절했음에도 하겐의 벌이는 충분했다. 물론 더 나중에는 술과 담배 회사의 광고도 도맡기도 했고. 이래서 셀럽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초대박 스폰서십, 골프 티 사용한 최초의 프로
하겐의 최초 기록은 또 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티를 꽂고 시합을 치른 최초의 프로골퍼라는 타이틀이다. 아니, 잠깐만. 그럼 여태까지 얘기한 하겐의 티샷은 골프 티를 안 썼다는 말인가?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티’를 처음부터 썼던 건 아니다. 이전에는 캐디가 미리 준비한 모래 반죽을 쌓아 공을 올려주면 티샷을 쳤다.


그러다 1920년 윌리엄 로웰이라는 치과 의사가 나무로 만든 골프 티를 고안해냈다. 물론 보수적인 골퍼들은 이 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캐디가 알아서 해주는 일을 왜 골퍼가 직접 (허리를 숙여가며)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이 티가 개발된 1920년부터 현재까지 약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 이 티를 사용한 걸 아는 우리로선 우습기까지 한 일이다.

 


US 오픈 우승 상금의 5배를 베팅한 치과의사
골프 티로 특허를 낸 로웰은 일생일대의 베팅을 한다. 당대의 슈퍼스타 월터 하겐과의 계약이었다. 하겐이 시합에서 직접 티를 사용하는 조건으로 2,500달러라는 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 금액은 당시 US 오픈 우승 상금의 5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티 박스에 걸어 들어가 티를 꽂는 월터 하겐의 모습은 혁명 같은 것이었다. 시합 때마다 직접 자기 주머니에서 티를 꺼내 원하는 높이로 티를 꽂고 샷을 한 후, 다시 티를 주워 페어웨이로 향하는 하겐의 모습은 금세 선망의 대상이 됐다.


하겐이 캐디가 해야 할 일을 골퍼가 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편견도 깨지기 시작했다. 곧 모든 골퍼가 그를 따라 티를 꽂기를 원했다. 이래서 사람은 유명해지고 봐야 한다.


로웰은 연간 3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다. 울워스 백화점에서만 10억 개의 티를 주문했다고 하니 월터 하겐을 활용한 스폰서십에 대한 베팅은 대성공이었다.

 

그 당시 하겐을 비롯한 모든 골퍼가 골프 티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다면, 어쩌면 라운드 전날 볼에 라인을 긋는 대신 모래 반죽을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영국을 정복하라
미국이 마치 골프의 종주국이라도 된 듯한 현대의 위상만 안다면 조금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1920년까지 영국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미국 태생 골퍼는 없었다.


하겐은 처음으로 영국으로의 원정 계획을 세운다. 미국 골프계를 ‘침략’해 오랜 세월 장악하고 있는 영국에게 역습할 때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이때 야구선수가 될 뻔했던 월터 하겐을 골프계로 돌려세웠던 후원자, 윌라드가 다시 등장한다. 윌라드는 이번에도 월터 하겐의 영국 출전 경비를 스폰서 하기로 했다.

 

반스와 함께 뉴욕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간 하겐, 1주일이 넘는 항해 끝에 영국에 도착한 하겐은 연습 라운드조차 초대받지 못했다. 영국 골프 협회가 그를 견제하기 위해 링크스 코스에서의 연습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겐의 도장 깨기: 영국 편
1920년 디 오픈은 샌드위치의 ‘딜’에서 열렸다. 연습 라운드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클럽하우스로 들어가는 하겐을 클럽 직원이 황급히 달려와 막아섰다. 예상하다시피 “프로골퍼는 클럽하우스를 사용할 수 없으니, 프로샵에 마련된(허름한) 방을 이용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겐이 누구인가. 미국에서도 겪은 익숙한 경험이었지만, 먼 원정길을 떠나 온 ‘손님’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를 거부하며 아예 차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연습 라운드를 치렀다.

 

당시의 디 오픈, 즉 브리티시 오픈에서는 누구나 36홀의 예선전을 통과해야 했다. 72명을 뽑는 예선에서 하겐은 4위(76-71타)로 통과했다. US 오픈 챔피언의 라운드가 궁금했던 건 일반 골퍼만이 아니었다. 영국의 ‘위대한 삼총사’ 해리 바든, J.H.테일러, 제임스 브레이드도 그의 라운드를 보기 위해 대회장으로 왔다.


라운드가 끝난 후 테일러와 브레이드는 “하겐의 스윙과 기량은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바든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하겐은 디 오픈에서 우승할 수 있는 충분한 기량을 갖췄으며, 향후 디 오픈에서 여러 차례 우승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예언은 적중했다.

 

美 언론 “그 사람이 바로 하겐”
시합 첫날, 하겐은 정장 차림의 운전사를 고용해 다임러 리무진을 타고 등장했다. 리무진은 클럽하우스 정문 바로 앞에서 정차했고, 하겐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블랙앤화이트가 반짝이는 골프화, 흰 닉커스 팬츠와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고,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멋쟁이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영국 선수들과는 너무 달랐다.


점심시간이 되자 클럽하우스에서 식사할 수 없었던 하겐은 다시 리무진으로 가더니 근처 호텔에서 배달시킨 음식을 먹었다. 클럽하우스 매니저가 차를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하겐은 거절했다.


영국의 ‘전통’에 도전하는 하겐의 이런 행동들은 가십거리가 됐다. 영국과 미국 언론에 이 모습들이 보도됐다. 모르긴 몰라도 미국 언론은 하겐의 모습을 보도하며 ‘카타르시스’ 같은 걸 느꼈으리라. 자, 이제 성적을 내는 일만 남았다.


‘아…성적이 안 받쳐주네’
개인의 인생만이 아니라 세상사가 다 그렇다. 내 마음 같지가 않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영국의 전통에 도전하던 기세는 좋았찌만, 첫 라운드에서 83타를 치며 이미 우승 경쟁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영국의 바람을 얕본 것이 화근이 됐다.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페어웨이 벙커를 넘길 수 있다”, “하늘에는 벙커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던 하겐의 볼은 돌풍 같은 바람을 뚫지 못했다. 도무지 앞으로 날아가지 않는 샷이 몇 차례 이어지고 하겐은 53위로 시합을 마감했다. 4라운드를 모두 마친 선수가 54명이었으니 꼴찌나 다름없었다.


하겐의 시합 역사상 이런 성적은 없었다. 하지만 하겐은 기죽지 않고 큰소리를 쳤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리더 보드 꼭대기에 이름을 올리고, 클라렛 저그에 내 이름을 새기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성적은 처참했지만, 영국에서의 경기는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 저탄도 샷이 필요하다는 걸 배우게 된 계기도 됐다.


영국에서 뺨 맞고, 프랑스에 화풀이?
첫 영국 원정길에서 크게 창피를 당한 월터 하겐.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베르사유 인근에서 열린 ‘프렌치 오픈’에 참가 신청을 한 하겐은 이번엔 프랑스로 건너갔다.

 

영국 원정 중 ‘절친’이 된 톱 골퍼 조지 던컨과 에이브 미첼과 함께였다. 프렌치 오픈에 이 정도로 유명한 선수들이 모인 사례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골프 클럽의 ‘관례’도 영국과 다름없었다. 프로골퍼의 클럽하우스 입장 금지 룰 말이다.


역시 프로샵의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는데, 당연히 로커도 없었고, 악취가 나는 방에 못 몇 개 박아놓은 수준이었다. 영국 선수들은 이런 환경이 익숙해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에도 하겐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겐의 도장 깨기: 프랑스 편
하겐은 영국의 스타플레이어인 던컨과 미첼과의 회의를 거쳐, 해당 골프클럽의 회장인 피에르 데샹을 찾아가 “클럽하우스의 로커를 쓰지 못한다면 3명 모두 참가를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개장 이래 가장 유명한 선수들이 모인 기회를 날리기 아까웠던 회장은 결국 굴복하고, 프로골퍼들에게 클럽하우스를 개방했다. 프로골퍼가 ‘정식’으로 클럽하우스에 들어가게 된 건, 프랑스 골프 역사에서도 최초의 사건이었지만, 그 대회에 참가한 영국 골퍼들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성적도 받쳐 줬다. 4라운드 시합 결과 하겐은 298타로 프랑스의 유진 라피드와 공동 선두가 돼 다음날 36홀의 연장전을 치렀다. 연장전 결과 하겐은 4타 차 우승을 따내면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서야 미국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하겐과 마찬가지로 많은 미국 골퍼가 브리티시 오픈과 함께 이 프렌치 오픈에도 도전했지만, 하겐 이후 미국 골퍼의 우승은 무려 35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주인공은 바이런 넬슨이다. 프랑스 골프계라고 호락호락했던 게 아니라는 얘기다.


1920년 US OPEN, 클럽하우스도 OPENED
1920년 US 오픈은 오하이오주의 인버네스GC에서 열렸는데,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던 대회다.

 

1902년생의 위대한 골퍼 ‘보비 존스’와 ‘진 사라센’이 18세가 돼 처음으로 참가한 US 오픈 데뷔전이자, 1913년 프란시스 위멧에게 패배했던 영국의 해리 바든과 테드 레이가 7년 만에 재도전 출사표를 낸 대회였기 때문이다. 보비 존스와 진 사라센 같은 젊은 골퍼에게 월터 하겐은 아이돌과 다름없었다. 엄청 떨렸겠다.


3라운드 후 선두는 놀랍게도 50세의 해리 바든(218타)이었다. 조크 허치슨과 레오 디젤에 1타, 테드 레이에 2타 앞서고 있었다. 4라운드 12번 홀, 바든은 여전히 4타 차 선두였다.

 

이때 갑자기 강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50세 노장 바든의 기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고, 보기를 범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든은 78타를 써내 결국 4라운드 합계 296타로 대회를 마무리했고, 4라운드에서 75타로 선방한 43세의 테드 레이가 1타차로 우승했다.


하겐은 11위였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미국의 프로골퍼를 위한 큰 변화를 만들었다. 브리티시 오픈과 프렌치 오픈에서도 클럽하우스 문제로 늘 갈등을 겪던 하겐이 USGA에 공식적으로 프로골퍼의 클럽하우스 사용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하겐은 “만약 거절할 경우 (영국에서 그랬듯) 다른 방법을 찾든지, 아니면 전년도 챔피언으로서 대회 참가를 거부하겠다”며 강한 의사를 밝혔다.


신은 사람은 재산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결국, USGA도 하겐의 요구를 수용했다. 드디어 프로골퍼가 아마추어 선수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겐은 이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의미로 동료 프로들과 모금해 인버네스GC의 클럽하우스에 2.5m 높이의 거대한 벽시계를 선물했다. 이 벽시계는 지금도 해당 클럽에 전시돼 있는데, 시계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God measures men by what they are. Not by what they in wealth possess.’

(신은 사람을 재산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현재 어떤 사람인가를 보고 평가할 뿐이다.)

미국 골퍼들의 숙제 ‘디 오픈 우승’
1920년 테드 레이(영국)의 US 오픈 우승 이후 미국 선수들은 브리티시 오픈에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와신상담 중이었다. ‘영국 선수가 US 오픈 우승을 가져갔으니 미국 선수도 그들의 우승컵을 가져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21년, 하겐은 US 오픈에서 2위를 했고,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했지만, 브리티시 오픈에서는 6위에 그쳤고 전혀주목받지 못했다. 대신 미국의 조크 허치슨이 우승했다.


1907년 프랑스의 아르노 마시가 최초의 외국인 우승을 차지한 뒤 2번째 사례였다. 영국 언론은 ‘조크 허치슨은 영국 태생이므로, 아직 완전한 미국인의 승리는 아니다’라고 보도해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1922년, 3번째 도전 만에 드디어
다음 해인 1922년 6월, 로열 세인트 조지에서 열리는 브리티시 오픈에 하겐이 3번째 도전장을 냈다. 전년도 챔피언인 조크 허치슨과 짐 반스 등 미국의 톱 골퍼들도 대거 참여했다.


첫날 36홀에서 하겐은 76·73타로 선두가 됐고, 2타 차로 J.H.테일러, 짐 반스, 조지 던컨이 뒤쫓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3라운드에서는 73타를 친 허치슨이 226타로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놀랍게도 51세의 테일러가 1타 차 2위를 기록하고 있었고, 79타를 친 하겐은 반스 등과 함께 3위로 밀려났으며, 던컨은 81타를 쳐 선두와 6타차가 되면서 우승의 희망이 사라진 듯 보였다.


궂은 날씨 속에 계속된 오후 4라운드. 하겐은 72타를 쳐 300타를 기록했고, 우승이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오전에 81타를 쳤던 1920년도 챔피언 ‘조지 던컨’이 기운을 냈다.

 

던컨이 파4 18번 홀에 도착했을 때는 하겐과 동타를 이뤘고, 연장전이 예상됐다. 그러나 마지막 고비에서 던컨은 보기를 범해 301타로 2위가 되고 만다.


‘로열 세인트 조지’에서의 브리티시 오픈에서 70타를 깬 선수는 없었는데, 던컨은 69타의 코스 레코드는 기록했지만, 우승은 하지 못한 것이다. 1위는 월터 하겐이었다. 드디어 미국 ‘출생’의 미국 골프 선수가 처음으로 영국의 디 오픈을 정복한 것이다.


하겐은 시상식에서 우승 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통째로 캐디에게 선사했다. 통 큰 아량이기도 하지만, 이 우승의 의미는 상금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국 골프를 ‘최고’의 반열에 올린 하겐
영국 언론도 이제는 미국 골퍼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겐의 우승은 미국 골프가 영국에 역전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실제로 이후 영국은 ‘골프 최강국’이라는 타이틀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고, 이는 2023년 현재까지에 이른다.


서른 살의 하겐은 우승컵 클라렛 저그를 품에 안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세계 최초로 US 오픈, 브리티시 오픈, PGA 챔피언십을 제패한 ‘위대한 챔피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겐의 독주는 이제 끝물이었다. 20세의 신성 보비 존스와 진 사라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922년 7월 US 오픈(스코키CC.일리노이)에서 진 사라센이 우승, 보비 존스가 준우승을 차지했고, 사라센은 같은 해 PGA챔피언십(오크몬트CC.펜실베이니아)까지 우승하면서 한해에 US 오픈과 PGA챔피언십을 동시에 제패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사라센은 165㎝의 단신이었지만, 골프계 거인이 됐다. 그는 하겐의 아성에 가장 근접한 선수였다. 이런 후배들의 도전이 있었음에도 하겐은 연습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는 않았다.

 

하겐은 “연습장에서는 아까운 ‘굿샷’을 낭비할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연습은)잘못된 것은 쉽게 발견하지만, 필요한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 라운드에서 5개쯤 나쁜 샷이 나오는 건 보통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물론 “나쁜 샷이 연속해서 나온다면 큰 문제”라고 단서를 붙였지만.

 

1927 첫 번째 라이더 컵이 열리다
1927년 첫 번째 라이더 컵 대회가 미국에서 열렸다. 얼마 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풀 스윙〉에서도 공개됐듯 이 대회는 미국과 유럽의 골퍼들에게 단순한 대회 이상의 명예라는 의미가 있다.

 

결과적으로 리브 골프 행을 택했지만, 이안 폴터도 다른 것보다 라이더 컵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 때문에 마지막까지 이적을 고심하는 모습이 나왔을 정도다.

 

하겐은 영국이 제안한 이 국가 대항전 아이디어를 좋아했고, 미국 대표로서 첫 대회를 개최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브리티시 오픈 출전도 포기하면서까지 기금을 모금했다. 물론 스스로 찬조금도 냈다. 하겐은 라이더 컵에 선수로 5회, 미국 팀의 캡틴으로 6회 참가하며 미국 골프계를 대표했다.


“영국 클럽하우스도 문 열어라!”
1928년 브리티시 오픈은 6년 전 하겐에게 첫 우승을 선사했던 샌드위치의 로열 세인트 조지에서 열렸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진행된 72홀 매치플레이 시범경기(뮤어파크 GC)에서 하겐은 18대 17로 패하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미·영 언론은 “이제 하겐의 시대는 끝났다”고 보도했고, 당연히 브리티시 오픈 우승도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하겐은 총 292타로 우승했다. 이때의 우승이 중요한 것이 갤러리로 나온 에드워드 왕세자가 하겐에게 직접 클라렛 저그를 수여했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돼 40년 넘는 우정을 이어가게 되는데, 에드워드 왕세자와의 친분이 영국의 클럽하우스 문턱을 없애는 데 주효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먹힐까’
1926년 디 오픈에서 시합 도중 하겐은 사라센, 존스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클럽하우스로 들어가다 제지당한 일이 있었다. 보비 존스는 프로골퍼가 아닌 아마추어였으니 ‘혹시나?’ 싶어 기대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어쨌든 결국 하겐이 자리를 털고 나오자 사라센과 존스도 따라 나왔었다.


1928년부터는 그런 수모는 없어졌다. 1928년도 디 오픈이 끝나고 에드워드 왕세자는 하겐에게 “며칠 머물며 함께 라운드하자”고 제안했다. 하겐도 흔쾌히 응했다. 벌써부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라운드 후 점심시간, 왕세자와 하겐이 클럽하우스에 들어섰지만 아무도 맞이하거나 주문받으러 오질 않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왕세자가 매니저를 호출했다. 매니저는 “영국 전통상 프로골퍼는 클럽하우스에 입장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왕세자는 그 자리에서 “그 전통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더불어 ‘프로골퍼도 클럽하우스에 입장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전통을 영국 전체 골프장에 적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계급의 벽을 허문 주인공인 하겐이 드디어 영국에서도 클럽하우스 문턱을 없애버린 희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서른 여섯, 마지막 메이저 우승
1929년 제2회 라이더컵 매치는 영국에서 열렸다. 하겐은 미국팀의 주장으로서 영국팀의 주장 조지 던컨과 맞붙어 10대 8로 참패했고, 팀도 7대 5로 패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하겐은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는 뮤어필드GC(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갔다.


마지막 날 불어닥친 강한 비바람이 변수가 됐다. 하겐은 바람의 영향을 피하려고 낮은 탄도의 샷만 구사했다. 드라이버를 칠 때도 지면에서 7m 이상 뜨지 않는 구질을 고수했을 정도. 결국, 2위를 6타 차로 크게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36세, 월터 하겐의 브리티시 오픈 4번째 우승이자, 11번째 메이저 우승이었고, 그의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었다.


같은 해 US 오픈에서 하겐은 우승 경쟁에 뛰어들지 못하고 19위에 그쳤다. 우승자는 보비 존스였다. 이듬해인 1930년, 보비 존스는 US 오픈과 US 아마추어, 브리티시 오픈과 브리티시 아마추어 타이틀을 모두 획득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고, 하겐의 전성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기록으로만 남은 하겐이라는 이름
위대한 골퍼 하겐은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1963년 하겐의 손자 월터 하겐 3세가 15살 나이에 권총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1969년 10월 5일 하겐이 숨을 거뒀으며, 1982년 하겐의 아들 월터 하겐 주니어마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956년 하겐은 자서전 〈The Walter Hagen Story〉를 발행했다. 자서전에서 자신의 인생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Don’t hurry. Don’t worry. You are only here for a short visit. And be sure to smell the flowers along the way.”


해석하자면 ‘짧게 살다 떠나갈 인생, 너무 서두르지도, 걱정하지도 말라.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게 될 꽃향기들도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인생까지는 아니라도 골프를 치면서 기억해두면 도움이 될 만한 격언이 아닌가 싶다. 하겐이라는 이름은 기록과 업적으로만 남게 됐지만, 그것이 너무 빛나는 것이기에 아쉬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료 〈더 멀리 더 가까이〉 도서출판 충영, 박노승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