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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사라센, 처음이자 마지막 ‘디 오픈 우승 스토리’

9년의 슬럼프, 명 캐디와의 조우로 극복하다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딱 스무 살이 되던 해, US 오픈과 PGA 챔피언십 동시 석권. 사상 최초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달성.

165㎝의 단신이었지만 최고의 장타자로 인정받고, 자신의 약점인 벙커 플레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샌드웨지를 발명해 버린 남자.

유진 사라체니라는 본명이 골프선수답지 않은 것 같아서 골프를 본격적으로 치기도 전인 열여섯 살에 이름을 바꿔버린 설정 마니아, 진 사라센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참고자료 〈더 멀리 더 가까이〉(박노승, 도서출판 충영)

 

지긋지긋한 9년간의 슬럼프
1932년. 경제 불황으로 그간 모은 재산을 거의 모두 잃은 사라센은 슬럼프마저 겪고 있었다. 재기의 기회가 필요했고, 프로골퍼의 자산은 ‘그저 더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다. 우승을 못 하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동기부여가 됐다.


돌이켜보면 사라센의 슬럼프는 9년이나 지속됐다. 그의 첫 우승이 1922년이었고, 2년 뒤인 1924년에 그는 이미 메이저 3승의 스타였다. 이따금 승수를 추가하기도 했지만 ‘챔피언’의 골프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조크 허치슨이 구사하는 페이드 구질을 장착하려고 했던 게 화근이 됐다. 자신의 본래 스윙을 잃어버린 사라센이 찾은 솔루션은 ‘그립’이었다. 오른손 그립이 백스윙 톱에서 느슨해졌다. 오른손 엄지와 중지, 약지를 단단하게 고쳐잡았고, 왼손 스트롱 그립을 개발했다. 윌슨의 신제품 ‘리마인더 그립’의 도움도 받았고, 1929년에야 성적으로 나타났다.

 


연습벌레, 샌드웨지를 만들다
‘그저 더 열심히’ 연습하던 사라센의 다음 과제는 벙커 플레이였다. 웨지의 솔 부분을 둥그렇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바운스’ 개념이다. 벙커에서 리딩 에지보다 바운스가 먼저 모래에 닿으며 미끄러져 나가도록 직접 웨지 헤드를 깎아 가서 벙커에서 수천 개 이상의 공을 쳤다. 1년 뒤인 1932년 사라센은 드디어 최적의 바운스를 찾았다.


이 ‘비밀 무기’를 남몰래 가방에 넣고 나선 1932년 브리티시 오픈, 사라센은 우승을 차지한다. 9년간 이어지던 지독한 슬럼프에서 탈출한 것이다. 스포츠에 ‘if’는 없는 법이라지만, 이때마저도 우승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사라센의 마음이 꺾였다면, 그는 ‘제법 잘 하던 작은 선수’ 정도의 평을 받는 반짝스타 정도로 치부됐을지도 모른다.


“우승하고 싶다면 그를 채용하라”
1932년 브리티시 오픈(디 오픈)은 사라센의 경력에서 상당히 중요한 터닝포인트다. 그의 연습벌레 기질과 발명가적 기질, 중간에 꺾이지 않은 마음, 모두가 우승하는 데 도움이 됐겠지만, 주목할 점이 월터 하겐의 전 캐디 ‘스킵 대니얼스’가 사라센에게 조력했다는 점이다.


스킵과의 만남은 이보다 이른 4년 전, 1928년에 벌어진 조우다. 브리티시 오픈 출전을 위해 영국행 배에 탄 몇 명의 선수가 있었다. ‘떠오르는 샛별’ 사라센과 ‘당대의 아이콘’ 월터 하겐도 그 선수단 중 하나였다.


이때 사라센은 하겐에게 “나도 꼭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1922년과 1924년 오픈 챔피언 경험이 있는 골퍼인 하겐이 이렇게 답했다.


“오픈 우승에서 가장 중요한 게 캐디일세.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우승했으니 이번에는 내 캐디, 스킵 대니얼스를 빌려주지. 늙은 캐디인데 아주 비싸다네. 30~40파운드는 줘야 할 거야. 하지만 당신이 정말 우승하겠다면 그를 고용하게.”


명 캐디와의 조우
긴 슬럼프로 빈곤의 그림자를 마주하던 사라센이지만 캐디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다. 하겐에게 감사하며 스킵 대니얼스를 만나러 샌드위치로 갔다.


스킵은 한눈에 봐도 베테랑 캐디의 풍모를 물씬 풍겼다. 60세쯤 되어 보였지만 사라센은 그와 금세 친구가 됐다.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라센은 눈치를 챘다.

 

스킵은 본능적으로 선수의 사기와 자신감을 올려주는 방법을 아는 캐디였다. 코스 공략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빠삭하게 꿰고 있는 건 물론이었다. 사라센은 ‘어떤 경우라도’ 스킵의 의견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골프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던가. 첫 라운드에서 72타로 좋은 출발을 했던 사라센은 2일차 파5 14번 홀에서 시험에 들게 됐다.


61세 캐디의 눈물
티샷이 왼쪽 러프에 떨어졌다. 라이를 살핀 사라센은 ‘우드’를 요청했다. 스킵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페어웨이로 볼을 빼 파를 노리라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사라센은 버디 욕심이 났다. 물론 본인도 라이를 확인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캐디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는 일이었다.


결국 사라센은 고집을 꺾지 않고 우드로 스윙했다. 공은 겨우 20야드 날아가 다시 러프에 빠지고 말았다. 화가 난 사라센은 캐디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우드로 스윙하더니 결국 더블 보기로 홀을 끝냈다.


공교롭게도 이때의 2타가 뼈아픈 실책이 됐다. 마지막 날 하겐이 292타로 3번째 브리티시 오픈 우승을 했고, 사라센은 294타로 시합을 마쳤다. 결과론이지만, 둘째 날 캐디의 의견에 따라 파를 기록했다면 하겐과의 연장전을 벌였을 것이다.


KPGA에서 아내 김유정 씨를 캐디로 대동하고 대회에 나섰던 양지호가 2타 앞선 선두였던 대회 마지막 날, 파5 세컨샷에서 우드를 빼다가 캐디인 아내와 실랑이하던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물론 양지호는 고집을 꺾고 잘라 갔고, 우승했다. 대회가 끝나고, 코스를 떠나는 사라센을 스킵이 잡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미스터 사라센. 우리 다시 한번 도전하는 거죠? 내가 죽기 전에 당신과 함께 반드시 오픈 챔피언이 될 겁니다.”


그놈의 돈 때문에
다시 1932년으로 돌아가 보자. 결과적으로 사라센이 9년의 슬럼프를 탈출해 우승한 브리티시 오픈 말이다. 공교롭게도 1928년과 같은 코스인 샌드위치 프린스 클럽에서 대회가 열렸다.


사라센은 1929년과 1931년에도 디 오픈에 참가했지만, 큰 비용만 투자하고 우승하지 못해 손실이 컸다. 당시 우승 상금으로는 여행 경비도 커버하기 어려웠다. 사라센은 사실 1932년 디 오픈 참가를 포기하고 있었다. 포기하면 최소 2,000달러의 경비가 절약됐기 때문이다. 이때 사라센의 아내 메리가 등장한다. 그녀는 사라센이 최고의 기량을 완성한 것을 알고 있었고, 디 오픈 참가를 강력하게 권했다.


사라센은 결국 영국행 배를 타고 런던에 도착했다. 도착 다음 날 연습 라운드를 나갔는데 27세의 젊은 캐디와 함께 67타를 기록했다. 캐디와의 호흡이 잘 맞는다고 느꼈다. 캐디도 자신이 대회까지 함께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사라센이 “이미 스킵 대니얼스와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지만 젊은 캐디는 “나도 스킵을 잘 안다”며 “스킵은 나이가 이미 65세가 됐다. 눈도 나빠졌고, 며칠 동안 백을 들고 다닐 체력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젊은 내가 낫다”고 말했다.


사라센은 망설였다. 연습 라운드지만 67타라는 기록은 그가 영국 땅에서 기록한 최저타수였다. 무엇보다 젊은 캐디를 쓰면 캐디 비용도 절약할 수 있었다.


사라센은 결국 젊은 캐디와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대회 장소인 프린스 클럽에 도착했을 때 정문 앞에는 스킵이 사라센을 기다리고 있었다. 4년 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늙은 모습이었다. 병색이 있고 정말로 눈도 나빠진 것 같았다. 4라운드 내내 백을 메는 캐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라센은 미안했지만 솔직히 사정을 설명했고, 스킵은 알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스킵의 사라센 사랑
사라센은 언론이 예상한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특히 사라센의 비거리가 코스 공략에 주효할 것으로 예상됐다. 연습 라운드를 거듭하던 사라센은 막상 젊은 캐디와의 호흡이 맞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샷이 흔들렸고 경기 내용도 나빠져 갔다. 사라센과 동반 연습한 다른 동료선수들이 눈치챌 정도였다. 거기에 연습 라운드 내내 갤러리 속에서 사라센을 따라다니는 스킵을 발견한 사라센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스킵은 다른 선수의 영입 제안을 거절한 채 사라센의 샷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선이 시작되기 2일 전 저녁, 동료선수가 사라센의 숙소를 방문해 “누가 봐도 문제인 젊은 캐디 대신 스킵을 기용하라”고 충고했다. 사라센도 동의했다. 다음 날 아침 스킵이 사라센을 기다리고 있었고, 둘이 함께한 마지막 연습 라운드에서 사라센의 샷은 마치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스킵은 “1928년보다 샷이 훨씬 좋아졌다”며 “특히 벙커 샷은 마스터의 경지”라고 극찬했다.


스킵은 각 홀의 공략법을 설명하며 샷에서 실수가 나오더라도 보기로 막으면 된다고 했다. 사라센은 이번에야말로 그의 제안은 무조건 따르기로 약속했다. 스킵은 둘째 날 아침 강한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허리를 숙이고 기어가듯 코스를 파악하는 프로페셔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사라센은 연습과 시합이 끝날 때마다 샌드웨지를 옷 속에 감춰 호텔로 돌아오곤 했다. 영국 선수나 진행위원이 발견하면 사용을 금지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와이어 투 와이어의 쾌거
첫 라운드에서 사라센은 4언더파로 선두에 나섰다. 둘째 날에는 69타로 코스레코드와 타이를 이뤘다. 스킵의 눈이 얼마나 잘 보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클럽 선택은 탁월했다. 사라센은 순조롭게 대회를 치러나갔다. 4라운드 7번 홀 보기로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자신감을 잃지 마라. 당신이 챔피언이 되는 건 확실하니 마무리만 잘 하자”고 격려했다.

 

결국 총 283타를 써낸 사라센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브리티시 오픈 우승을 차지했다. 그것도 무려 와이어 투 와이어였다.


시상식에서 사라센은 캐디인 스킵을 옆에 서게 해달라고 했지만, 주최 측은 영국 전통상 이를 거절했다. 시상대에 오르는데 멀리서 스킵이 자신의 손자를 자전거에 태우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라센은 자신의 폴로 코트를 스킵에게 주면서 “내년 1933년 디 오픈 때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쉽게도 그것이 명 캐디 스킵 대니얼스와의 마지막 대화가 됐다. 몇 달 뒤 사라센은 스킵이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는 사라센이 주고 간 폴로 코트를 절대로 벗지 않고 죽는 날까지 입고 있었다고 했다.

 

 

골프의 맛
사라센과 스킵은 비록 오래 호흡을 맞춘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라센이 스킵을, 스킵이 사라센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단순한 선수와 캐디로만 보이지 않는다. 사라센에게 스킵은 스승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의 지시와 조언대로 플레이해 길고 긴 슬럼프를 탈출한 사라센은 자신의 캐디를 완전하게 신뢰했고, 노구를 이끌고도 비바람 속에서 홀로 코스를 기어가며 공략법을 찾은 캐디의 이야기는 얼핏 만화적이다.


사라센은 “이 승리의 절반은 스킵의 몫”이라고 공표했다. 현대 골프에서도 캐디는 선수에게 보조자를 뛰어넘어 멘토이자 동반자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건 아마추어 골퍼도 그렇다. 전담 캐디가 없어도 말이다.

 

사라센과 스킵의 일화를 정리하면서 “잘라 가시는 게 낫겠어요”라는 캐디의 조언을 “명랑 골프라서 괜찮아요. 언제 잔디에서 우드 쳐 보겠어요”라며 일명 ‘쪼루샷’을 남발하던 라운드가 떠올랐다.

 

동남아에서 골프를 지면 1인 1캐디가 붙는 경우가 잦다. 때로는 2일간 같은 캐디가 배정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캐디에게 꼭 조언을 듣곤 한다. 꼭 더 좋은 성적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합의를 통한 클럽 선택으로 결과가 좋으면 그 기쁨이 배가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이 라운드하는 동반자보다 때로는 내 플레이를 잘 알아봐 주고 그에 맞는 조언을 하는 캐디와 단 한 번이라도 호흡을 맞춰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골프의 또다른 묘미가 아닐까.

 

(다음 편 '더블 이글의 주인공 진 사라센의 이야기'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