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장기표
22일 장기표가 세상을 떴다. 누구보다 맑고 순수했던 그가 말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78세의 나이로 암 투병 중 별세한 것이다.
‘재야 운동권의 대부’, ‘영원한 재야’로 불렸던 그다. 평생 민주화·노동·시민운동에 투신해 온 투사였다. 그는 늘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어떤 권력도 그를 회유하거나 굴복시키지 못했다. 권력자들이 ‘한자리’를 주겠다고 해도 결코 응하지 않았다. 옳은 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꼿꼿했다. 그는 옳지 않은 일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세상이 변해도 그의 기개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마지막 재야’라고 불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특권층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을 꿈꿔 왔다. 특히 그는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해지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1945년 12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 김해로 이사를 온 그는 마산공고를 거쳐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이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12년간 수배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는 4남 2녀 중 막내였다. 그 6남매 중 학교에 다닌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형들과 누나들은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이다. 봄에 장리쌀을 먹어야 했는데, 쌀 한 가마를 빌리면 두 가마를 갚아야 했다. 형들은 산에서 나무를 했는데, 발뒤꿈치가 갈라졌는데도 약이 없어 촛농을 부어 소독하곤 했다.
그는 처음엔 판사가 될 생각이었다. 판검사 등 권력층 여럿으로 모임을 만들어 세상을 바꿀 계획이었으나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대학 입학 후 곧 깨달았다. 주변의 친구들은 고시 공부를 하려 했고, 이에 실망한 그는 김용기 장로가 운영하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강의를 들어보았으나 근검과 절약만 주장했다. 그렇게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직접 운동권에 투신했다. 그의 평생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운동권 출신들이 정치권으로 옮겨갔다. 그도 국회의원 선거에 7번이나 나갔지만 모두 떨어졌다. 그는 낙선할 것을 알고 출마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삶의 목표에 대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해선 실패한 삶이라고 규정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대한민국이 엉망진창이라고 했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장기표 빈소)
그는 국민의 기본 생활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기본 생활은 의식주와 의료, 교육을 말한다. 또 국회의원, 고위직 법관과 검사, 행정부 고위 관료 등 고위공직자들이 특권을 누리고 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 많다고 꼬집었다. 그렇게 되면 부정부패가 생기고, 억울한 사람이 발생한다. 사회가 정의롭지 않게 되고, 불신과 갈등이 커진다. 국민은 법을 준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붕괴했다고도 했다. 특권층은 잘못해도 처벌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출세한다. 이런 상황에선 초중고교에서 인성교육을 해도 효과가 있을 리 없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 전과가 있는 사람들이 계속 출세하는데, 어떻게 인성교육이 되겠는가라고 그는 일갈했다.
법을 어긴 사람이 출세하는 것을 내버려 두면 다른 사람도 법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법치가 안 되고 있다. 헌법 11조는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했는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특히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뀌려면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맹목적으로 정치인들을 지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편 가르기에 편승하거나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면 안 되며, 지금까지 지지해왔던 것에 대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그는 말년에 국민연금과 베트남 참전 수당 등을 모두 합한 월수입 220만 원으로 평생의 반려자 부인 조무하 씨와 함께 생활했다. 그가 누구보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민주화의 대부’였지만, 민주화 운동 보상금은 수령하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그 보상금을 받았다면 누구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돈을 받지 않고 세상을 떴다.
정치권이 과거 어느 때보다 국민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요즘, 장기표와 같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지도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부디 이승에서 못 이룬 꿈, 저승에선 꼭 이루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김대진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