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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기회잖아? 나한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거네” 박세리를 박세리로 만든 〈The Shot〉

지이코노미 박준영 기자 | 박세리는 LPGA투어 통산 25승을 달성했다. 그럼에도 박세리의 ‘그 샷’이라고 하면 적어도 한국 골프팬들은 모두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 1998년 US 여자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그가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던 바로 그 장면이다.

 

LPGA가 박세리 U.S. Women’s Open 우승 25주년을 기념해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박세리처럼 해당 종목에서 한 획을 그은 톱 플레이어라면 더더욱 팬들의 뇌리에 각인된 〈더 샷〉이 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장면 말이다. 골프만 그런가 하면 물론 오산. 가까이 박지성을 박지성으로 만든 ‘The Goal’도 있다. 박찬호는 박찬호를 만든…아, 박찬호는 1994년 LA 시절이 만들었으니까 ‘The Season’인가?

 

LPGA에서 직접 박세리의 US 여자오픈 25주년 기념 다큐를 제작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의아함이 앞섰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 게 사실이다. 물론 반가움에 심장이 벌렁거리기는 했지만. 박세리 이후로도 수많은 한국 선수들과 아시아 선수들이 LPGA에 진출했고, 성과를 올렸다. LPGA는 뛰어난 기량의 선수를 보유했고, 박세리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지만, 희미해진 기억일 것 같았다.

 

 

[00분 01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PGA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 〈풀 스윙〉을 떠올리며, 유튜브를 뒤졌다. 익히 다 아는 사실과 내용일 것이지만, 의미가 있었다. 15분 11초 분량의 영상은 첫 장면부터 시간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썸네일을 클릭하는 순간부터 나는 1998년 US 여자오픈을 직관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영상의 00분 01초. 물에 발을 담근 박세리, 1998년의 그 박세리가 캐디가 내밀어 준 클럽을 고르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박세리를 잊은 건 LPGA가 아니라, 나였다. 최근 예능과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활약(?)하는 박세리를 보며 그가 어떤 선수인지 잊은 건 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게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길었던 연장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전까지는) 그런 연장전이 있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18홀을 추가로 재대결해야 하는 USGA룰의 연장전이었다. 하필 대회 코스였던 블랙울프 런은 박세리도 “역대 가장 어려웠던 코스로 기억한다”고 했을 정도로 몸서리를 친 곳이다. 연장전 전날, 이 소식(18홀 연장전)을 듣고 그는 “급격한 스트레스에 너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이거 ‘기회’ 아니야? 맞잖아, 기회”
박세리의 그 샷 시도에 대해 한희원은 “사실 10명의 선수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5명은 아예 시도조차 안 했을 수도 있는 샷”, 최나연은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시도는 해봤을까?’라는 물음표가 생기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도전 정신 운운하기 이전에 통상 너무 맞는 말이다.


골프는 리스크를 줄이는 종목이라고들 한다. 물론 어느 순간에는 앞뒤 재지 않고 도전해야 할 순간도 있다. 다만 그 도전에 성공한 극소수만이 흥하고, 대부분은 망한다. 극단적으로는 ‘괜히’ 그 도전을 했다가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혹자는 ‘실패했어도 준우승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상금 ‘얼마 얼마 차이’같이 가격을 매길 수 있는 리스크가 아니다.


그러나 이 리뷰에서 박세리가 위대했다는 걸 다시 읊으려는 건 아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가슴을 울렸던 건 물가에 떨어진 볼을 본 박세리의 심경이 ‘아직 나한테도 기회가 있구나!’였다는 점이다.

 

 

박세리의 인생샷
영상에서 박세리는 “드롭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다. 확률적으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가 보니 더욱 명확해졌다. 모래로 만들어진 지면이 내려앉았다. 가뜩이나 밖에서 볼 때보다 높은 언덕이 시간을 끌수록 더 높아졌다.

 

그런데도 “그때는 그냥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던 이유는 “이 경험을 통해서 내가 두 번 다시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박세리는 ‘뭐든 다 경험 속에서 얻는 것이기에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샷을 한 직후, 박세리는 볼이 어디로 어떻게 나갔는지 보지 못했다. 다만 손에 전해진 감은 현재까지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박세리는 이를 ‘인생샷’이라고 표현했다.


이 샷 이후, 연장 18번 홀은 동타로 끝났고 결국 서든데스에 들어갔다. 대회의 92번째 홀이자 연장전 20번째 홀에서 박세리는 우승을 차지했다. 추아시리폰도 선전했지만, 체력을 훌쩍 넘어선 연장전에 큰 난관까지 극복해낸 이를 꺾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다.


LPGA의 위상을 만든 박세리
영상에서 LPGA 관계자들은 LPGA가 현재의 위상에 이르는 데 박세리의 역할에 대해 “박세리가 ‘그 샷’을 선보일 때 매주 10개국이 LPGA 중계를 봤다. 지금은 190여 개국에서 LPGA를 시청하고 있다. 단 10개에서 190개까지. 그게 다 박세리 때문일까? 아마도(그럴 것)”라고 증언했다.


박세리의 1998년 ‘그 샷’을 본 최나연은 14년 뒤 같은 대회, 같은 골프장에서 우승해 자신의 꿈을 이뤘고, 3살 때 박세리의 트로피를 ‘갖고 싶다’고 느끼고 10살 때 골프를 시작한 고진영은 대한민국 여자골프의 간판이자 세계랭킹 1위를 가장 오래 수성한 주인공이 됐다.


박세리의 ‘그 샷’ 이후, 46명의 한국 선수가 200회가 넘는 LPGA투어 우승을 거뒀고, 박세리가 LPGA투어에 데뷔한 1998년, 6명에 불과했던 아시아 선수는 2023년 현재 총 69명으로 전체의 30%를 상회한다.

 

이 모든 걸 박세리의 ‘그 샷’이 만들었다. 그러나 박세리의 ‘그 샷’이 이렇게까지 회자되고,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며, 누군가의 꿈이 된 건 ‘그 샷’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샷’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도했기 때문에
이번에 공개된 박세리의 〈더 샷〉은 그저 골프 레전드의 일화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2023년, 대한민국은 1998년 IMF 당시보다 훨씬 더 잘 사는 나라가 됐지만, 그 시절 이상으로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다.

 

위기와 리스크는 최대한 피하고, 안정과 만족이 미덕인 사회가 됐다. 잃을 게 많아졌기 때문일까. 지킬 게 늘어났기 때문일까. 박세리의 ‘그 샷’을 보고 이를 악물던 정신은 이제 고전의 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도전하는 이를 보며 희망을 얻는 건 어쩌면 도전하는 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말도 되는 것 같아서다.


물론 박세리가 그 샷에 성공해, 결국 우승까지 했고, 이후로도 10년여간 꾸준히 활약하며 25승을 거뒀기에 지금의 영광도 있을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박세리의 ‘그 샷’ 자체로도 희망을 얻었다.

 

도전이 손해처럼 여겨지는 이 시점에서 이 영상이 다시 한번 많은 이들의 ‘열정’이라는 걸 지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안분지족에 젖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독자라면 꼭 시청하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