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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수로 만나는 세계명화] 고갱 〈이아 오라나 마리아〉

큐레이터에게 기증을 거절당했던 고갱의 대표작

혼을 담은 손으로 수놓은 ‘혼자수’ 이용주 작가가 원작과 같은 사이즈로 원작가가 표현 못 한, 숨겨지고 변화하는 빛을 담아 작업한 세계명화의 이야기를 전한다.


WRITER 이용주

 

 

기증을 거절당한 고갱의 대표작
이 작품 〈마리아를 경배함〉의 화면 왼쪽 아래 쓰인 글귀가 작품의 제목이 됐다.

 

이 글귀는 타히티섬 마오리족의 말인데 “마리아 당신을 경배합니다”라는 의미로 타히티식 ‘수태고지’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가 예수 탄생을 예고(수태고지)하면서 건넨 인사말 ‘아베 마리아’와 같다.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과 어깨에 앉은 아이 머리 위에는 후광이 장식돼있는데, 이들이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왼쪽 끝에 노란색 날개를 단 천사가 두 여인을 마리아와 예수에게 안내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천사장 가브리엘이다.

 


아래에는 폴로네시아에서 제물을 바칠 때 사용하는 제대 위에 열대과일들을 올려놓았다.


이 그림은 많은 습작을 통해 완성된 것으로 고갱 본인도 만족해한 작품이다. 원시의 순수함과 생명력으로 찬 이 작품이야말로 어떤 종교화보다 성스럽다고 생각했다.

 

고갱이 이 작품을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했음에도 큐레이터에게 거절당한 일화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현재 고갱의 대표작이 된 이 작품, 큐레이터의 안목이 아쉬울 따름이다.


고갱은 누구인가
폴 고갱은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로 반 고흐, 폴 세잔과 함께 20세기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 꼽힌다. 서머셋 모옴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이기도 한 고갱은 1848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에서 1903년(55세) 죽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고갱이 1살 때 보수 성향의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잡자 진보 언론인이었던 고갱의 아버지는 위협을 느끼고 아내의 친척이 있는 페루로 가족을 데리고 떠난다. 페루로 가는 항해 도중 고갱의 아버지는 사망했고, 고갱은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5년간 페루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다.


17세 때부터 고갱은 외항 선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7년 후인 24세 때에는 배에서 내려 증권가에서 일하게 됐는데 미술품 수집을 하다가 아마추어 화가로 변신했고, 드가, 피사로, 카미유 등의 인정을 받아 28세 때 처음으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그는 25세 때 덴마크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34세 때는 증권가를 떠나 화가로 전업하려고도 했지만, 이미 다섯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였기에 주변에서 반대했다. 이후 생활고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덴마크로 가기도 했지만, 고갱은 화가로 남길 원했다.


고흐 형제와의 조우 그리고 평생의 꼬리표
1887년 그가 39세 때 당시 신인 화가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를 만난다. 고흐는 그를 존경했고, 이듬해인 1888년, 파리에서 250㎞ 떨어진 ‘아를’에서 고흐가 만들겠다는 화가공동체에 합류(1888.10.23.)하게 된다.


두 달간 고흐와 같이 머물면서 작업하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고갱은 당시 고흐를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고 도망가고 만다.


43세 때인 1891년에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과 창작열을 이유로 프랑스에 아내와 다섯 아이는 그대로 둔 채 타히티로 훌쩍 떠났다.


프랑스를 그렇게 떠난 고갱은 타히티에서 미성년 소녀와 결혼하는데, 이런 일들이 그에게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의 꼬리표로 죽을 때까지 따라 다닌다.

 


고독감에 돌아온 고향 파리 ‘안 풀린다’
고갱은 타히티로 떠나면서 이후 10여 년 동안 죽을 때까지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다. 첫 번째 타히티에서의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향수와 고독감으로 2년 만에 파리로 돌아와 개인전을 열어 타히티의 그림 80여 점을 선보였으나 반응이 없었다.


흑인 혼혈 자바네즈를 모델 겸 애인으로 삼아 창작열을 불태우던 중 우발적인 폭력 사건에 휘말린다. 골절상을 입고 병상에 있는 몇 개월 사이에 그녀와 헤어졌다.


연이은 사건으로 고갱은 프랑스를 떠나 다시 타히티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 지상낙원인 타히티로 같이 가자고 했지만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95년 9월, 다시 타히티에 도착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 얻은 매독과 골절상의 후유증으로 몸은 쇠잔하고 우울증이 겹쳐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으며, 나병 환자로 오해받기도 하던 와중에도 끝까지 붓을 놓지는 않았다. 건강 악화로 한 달 넘게 병상에 누워 있던 고갱은 타히티로 돌아온 지 약 8년 후인 1903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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