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지애의 ‘라스트 댄스’는 여전히 계속된다
정치에 ‘피닉제’가 있었다면, 골프에는 ‘피닉지애’가 있다. 불사조 같은 신지애의 골프 인생이 영원할 듯 불타오르고 있다. 이는 10년 전 부상으로 인해 LPGA 투어 카드를 자진 반납하고 JLPGA 투어로 갈 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LPGA 투어에서 뛰었던 신지애는 2011년부터 손바닥 수술과 허리 등에 부상에 시달렸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스윙 교정도 했지만, 결국 슬럼프에 빠졌다. 당시 신지애는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할 만큼 압박감에 시달렸다. 힘겹던 미국 생활을 접고 JLPGA 투어로 간다고 했을 때 모두 신지애의 골프 인생은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신지애는 JLPGA 전념한 첫해부터 차곡차곡 승수를 쌓았다. 어렸을 적 즐겼던 ‘골프’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피닉지애’의 화려한 부활의 날갯짓이자, ‘10년’ 동안의 라스트 댄스, 피닉지애의 전설로 바뀐다.
EDITOR 방제일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4년 9월 신지애는 LPGA 투어 카드를 자진 반납하고 JLPGA 투어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지금 생각해봐도 미쳤다고 말할 만큼 파격적인 행보였다. 이 선택은 신지애로서도 도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신지애를 후원했던 스폰서와 계약도 끝난 상황이었다.
신지애의 성적도 신통치 않았기에 스폰서는 연장 계약을 제시하지 않았다. 냉혹한 프로 세계의 비즈니스다. 하지만 신지애에게 골프는 비즈니스가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가 달린 밥벌이였고, 평생을 바친 꿈이었다. 그 꿈은 이미 미국 진출로 절반 이상은 이룬 상태였다. 신지애는 이제 조금은 부담감을 내려놓고 즐거운 골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JLPGA 투어에 ‘올인’하기로 결심한다.
골프 인생을 건 한판 승부
신지애는 평생 ‘승부의 세계’에서 사는 ‘승부사’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KLPGA 투어 상금왕에 올랐던 신지애는 해외로 시선을 돌린다. 2008년 신지애는 비회원 신분으로 LPGA 투어에서 3승을 거두며 신예 돌풍을 일으켰고, 2009년 정식으로 LPGA 투어에 데뷔한다. 2010년까지 신지애는 LPGA 투어에서 무려 8승을 거둔다. 당시 세계 랭킹 1위에도 오르며, 그야말로 LPGA 투어 무대를 호령했다. 부상이란 망령은 언제나 영광의 순간에 찾아온다. 2011년 허리 부상을 입으면서 신지애의 골프 인생은 180도 바뀐다.
신지애를 추앙하던 언론은 언제나 그랬냐는 듯 신지애를 깎아내린다. 추후 신지애는 당시 스트레스로 인해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2012년 LPGA 투어에서 2승을 거두긴 했지만, 여전히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골프가 즐겁지 않았다. 당시 신지애는 그야말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었다. 그때쯤 신지애는 깨닫는다.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2013년쯤 신지애에게도 선택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신지애 골프 인생 중 가장 위기였던 시절이다. 일본으로 간 이후 신지애의 모자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스폰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지애와 같은 스타 선수가 스폰서가 없는 하얀 모자를 쓴다는 것 자체가 한편의 ‘난센스’인 상황이었다. 그만큼 신지애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정상이 아니었다.
트라우마로 남은 LPGA 투어 생활
신지애는 LPGA 투어에서 뛰면서 드라이버 비거리에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2013년 신지애는 LPGA투어 드라이버 비거리 부문에서 239.5야드로 122위에 그쳤다. 1위였던 니콜 스미스와는 무려 35야드 차이가 났다. 이는 세컨드샷 상황에서 두세 클럽을 더 길게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샷 정확도가 강점인 신지애로서는 자신의 주 무기를 버린 채 경기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특히, LPGA 투어 코스의 전장은 더욱 길어지면서 신지애의 고민도 커졌다. 여기에 LPGA 투어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회를 치르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코스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동안 신지애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코스 적응과 짧은 비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펼쳐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당시 일본 코스는 전장의 길이보다 아기자기함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특히 페어웨이와 러프의 차이를 확실하게 구분해 정확성이 떨어지면 불리하도록 코스를 세팅했다. 샷 정확성만 놓고 본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신지애는 여전히 세계 정상급이다.
여기에 일본의 대회 코스는 또한 한국과 코스와도 비슷하다.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일본에서 활약하는 선수 중에서는 드라이버 비거리도 크게 뒤처지지 않아 자신감을 갖고 스윙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봤을 때 신지애로서는 JLPGA 투어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전성기를 맞이할 20대 중반 나이에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큰 도박이자 모험이었다. 하지만 신지애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선택은 결국 옳았다. 신지애는 JLPGA 투어에 전념한 첫해부터 우승을 차지한다.
숙녀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2010년대 LPGA 투어는 한국 여자 골퍼들의 독무대였다. 10년은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신지애가 LPGA 투어를 떠난 지 딱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 LPGA 투어는 한국 여자 골퍼의 독무대가 아니다. 최근 성적을 보면 ‘독무대’란 말 자체도 사실 낯 간지럽다. 그만큼 한국 여자 골퍼의 성적은 처참하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US 여자 오픈 우승자가 누가 될지는 사실 한국 언론의 관심사 밖이었다. 한국 여자 골퍼가 우승을 기대하긴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그렇다. 바로 ‘신지애’다. 신지애는 불사조처럼 살아나 활약했다. 신지애는 4년 만에 출전한 US 여자 오픈에서 보란 듯이 2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가치와 선택을 증명했다. 그는 US여자오픈에서 그는 전성기로 되돌아간 듯 정교한 샷과 노련한 운영,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여줬다. 이 자신감은 인터뷰에서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신지애는 “1·2라운드에선 어린 선수들 힘과 스피드를 따라서 하려다 템포를 놓쳤다. 3라운드부턴 내 게임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새로운 세대를 지켜보며 감명받았고,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자신감은 당연히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지애는 지난 2월 호주 여자오픈에서 62승을 한 것에 이어 JLPGA 개막전에서도 우승하며 통산 64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는 한국인 역대 최다승이다. 그뿐인가? JLPGA 투어 상금 1위에, 대상 포인트까지 1위다. 남들은 이제 은퇴할 나이에 말이다. 실제로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미셸 위는 이번 US 여자 오픈에서 공식 은퇴했다.(미셸 위는 1989년생이고, 신지애는 1988년생이다) 동갑내기인 박인비도 임신을 해 잠정 은퇴 상태이며, 한 살 많은 최나연은 올해 초 은퇴했다. 동년배들의 은퇴에도 신지애는 여전히 JLPGA 투어를 점령하고, 세계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즐겁게 골프를 하고 싶었다”
신지애를 보면 생각나는 문구가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축구 선수 이영표의 말이다. 이 말에 농구 선수 서장훈은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농구는 철저히 전쟁터였기에 즐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구를 즐기지 않았기에 최고가 됐다고 반박했다. 실제 서장훈은 부상을 안 달고 뛴 시즌이 없을 만큼 힘겹게 프로 생활을 이어 나갔고, 한국 농구사에서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됐다. 그렇다면 저 말에 골프 선수 신지애는 어떤 대답을 할까? 신지애의 성장 과정은 다들 이미 너무 많이 회자해 누구나 아는 얘기다. 그렇고 그런, 진부한 성공 스토리일지도 모른다.
신지애는 중3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읜다. 신지애는 그 사고로 중상을 입은 동생을 아버지와 돌보며 피눈물 나는 훈련을 이어간다. 160cm도 안 되는 작은 키와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신지애는 지독한 연습과 강한 정신력을 무기로 프로에 데뷔한다. 그는 오직 골프만을 위해 살았다. 프로 골퍼 중에 죽을 만큼 노력하지 않았을 골퍼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신지애는 정말 골프로 성공하지 못하면 죽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 극한의 환경 속에서 신지애는 죽은 공을 살려내며 꿈을 이룬다. 이 반복된 과정에서 신지애는 그야말로 피닉지애가 된다. 이렇게 강한 신지애가 JLPGA로 떠나며 한 말이 가슴 한구석에 턱하고 박힌다. “즐겁게 골프를 하고 싶었다”
신지애를 이 말은 곱씹을수록 마음 한편이 아릿하다. 피닉지애의 불사조 같은 골프 인생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앞으로도 즐겁게 골프를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오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