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상회 전경
‘서울골프상회’.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로드 숍이다. 낡은 4층 콘크리트 건물의 1층 왼편 가장자리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 중구 마른내로 14(저동2가 72-6). 서울 영락교회 바로 앞이다. 왕복 2차선 도로 맞은 편에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이 있다. 1967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57년이 됐다. 이 가게가 한 달 뒤, 올 연말에 문을 닫는다. 서울의 골프 역사가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취재 김대진 편집국장
문명선 사장이 골프클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명선 사장, “건물이 영락교회에 팔리는 바람에 문 닫게 돼”
이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은 문명선 사장이다. 1943년생이니 올해 만 81세다. 1973년 1월 1일 가게 종업원으로 입사했다가 11년 뒤인 1984년 이 가게를 인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게를 지켜왔다. 기자가 가게를 찾은 지난 11월 1일 오후 2시께 문 사장은 낡은 아이언 클럽의 그립을 교체하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체구였다. 그립 교체를 후딱 끝낸 그는 기자와 마주 앉아 이 가게의 역사, 아니 그의 인생을 들려줬다.
그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상냥했다. 내공이 느껴졌다. 아, 저래서 이 가게를 50년 넘게 지켜 올 수 있었구나.
“이 가게 건물을 영락교회에서 매입했다. 계약상 임대 기간이 내년 8월까지라 그때까지는 장사를 해도 되지만 올해처럼 장사가 안된 적은 없다. 원래 겨울철엔 장사가 잘 안된다. 이참에 아예 올 연말로 문을 닫으려고 한다. 이 건물은 영락교회 부속 건물로 사용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이 나이에도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한다. 힘든 줄 모르고 지내왔다. 그러나 이제는 기력도 많이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렵다. 이젠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려 한다. 미련이 없다.”
그는 크리스찬이다.
먹고 살기 위해 강원도 영월에서 무작정 상경, 굳은 일 하며 야간 학교에 다녔다
문명선 사장은 어릴 때 강원도 북면 마차리에서 살았다. 원래는 이북 출신이다. 북한에서 경찰을 했던 아버지가 먼저 월남한 뒤 엄마가 그를 업고, 두 살 위인 그의 누나 손을 잡고 3·8선을 넘어왔다. 남쪽에서 아버지를 만나 영월에 눌러 앉은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맛만 보고 그만 두었다. 1학기도 마치지 못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1959년께였다. 먼저 서울에 와 있던 누나를 믿은 구석도 있었다. 당시 서울 을지로 주변에 ‘고아선도원’이라는 곳에서 지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이었다. 야간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 것이다. 시골 중학교에서 1학년에 잠깐 다녔던 적이 있어 1학년은 건너 뛰었다. 그때 그는 온갖 굳은 일을 해봤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게 그의 학력의 전부다.
서울골프상회에 구비돼 있는 각종 골프용품
1973년 1월 1일 서울골프상회에 종업원으로 입사해 지금까지 가게를 지켰다
그는 야간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 “4대 독자인데 몰라서 군에 갔다. 알았으면 안가도 됐는데...” 그가 웃었다. 군에선 운전병으로 근무했다.
1967년 7월 제대 후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아 어떤 회사의 사장 개인 기사로 일했다. 그런데 몸이 아파 하루 결근했다. 사달이 났다. 하루 아침에 화물차 기사로 발령이 났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인사 담당자에게 “당신은 부장을 하다가 과장으로 내려보내면 근무를 할 수 있겠느냐”고 따졌다. 결국 그는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뒀다.
갈 곳이 없던 그는 서울골프상회에 종업원으로 입사했다. 그때가 1973년 1월 1일이었다. 누나의 권유도 있었다. 첫 월급은 3만 원이었다. 서울골프상회는 매형의 처남들이 차린 가게였는데 그분들이 돈을 벌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매형이 인수해 운영하고 있었다.
싱글 기념패 이글 기념패
골프, 독학으로 배워 싱글 핸디캡 골퍼가 되었다
“당시 가게 건너편에 MBC 해설위원을 하던 안성근 씨가 프로 한 분과 함께 골프연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골프를 배우려고 했으나 매형이 못하게 말렸다. 3만 원 월급으로는 어렵다고 했다”
그는 매형의 눈치를 봐가며 가끔 골프연습장에 들러 구경했다. 그런데 그 안 씨가 가게에 오면 로스트 볼을 1, 2개 집어갔다. 그걸 보고 매형이 그를 나무랐다. 당시 로스트 볼은 500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골프연습장에 가지 않았다. 빈 스윙만 열심히 했다. 그리고 골프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게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침 그 당시 친구가 한양컨트리클럽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배려로 새벽에 신코스에서 27홀을 혼자서 돌았다. 공 2개로 27홀을 돌았으니 54홀을 친 셈이다.
그 후엔 다시 조인을 해서 18홀을 돌았다. “그렇게 18홀을 돌면 그늘집 비용 등으로 7, 8천 원을 썼다”
“골프는 ‘자치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그의 얘기다.
그는 퍼팅이 잘 안될 때 한 달간 눈을 감고 퍼팅 연습을 하며 임팩트 감을 익혔다고 한다.
그렇게 골프에 매진한 그는 마침내 1993년 5월 9일 78타를 쳤다. 싱글 기념패도 받았다. 관악C.C.(현 리베라C.C.)에서였다. 그 무렵 그는 이글도 여러 번 했다. 그때가 그의 골프 전성기였다.
그는 스윙을 양쪽으로 한다. 한쪽으로만 하게 되면 신체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빈 스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필드에는 잘 나가지 못한다. 기력도 떨어진데다 평일엔 가게를 지켜야 하고 주말엔 교회에 나가야 한다.
50년 넘게 골프 가게를 지키다 보니 골프에 대해 나름 혜안이 생겼다.
그는 골프는 머리가 좋은 사람, 땀이 들어가야 하고, 마음을 비워야 잘 친다고 생각한다.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와 한 조에서 우승 경쟁을 할 때도 자기는 ‘망신만 안 당할거야’라는 마음가짐으로 쳐서 이겼다”
그의 진단이다. 그는 골프에서 욕심을 내면 틀림없이 실패한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고 한다. 문 사장은 “골프는 참 좋은 운동인데 돈이 많이 든다. 코로나19 이후 그린피와 카트비, 캐디피가 너무 올랐다”고 아쉬워했다.
문명선 사장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지난날을 들려주고 있다
그는 이윤을 남기는 장삿속보다는 고객에게 맞는 골프채를 권하는 게 우선이다
로드 숍이 잘 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 쇼핑몰에 밀려 오래된 가게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
그는 “낙원골프, 해남골프, 가야골프 등 오래된 골프 가게들이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방산시장에 태봉골프가 남아 주인이 아직 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신형, 이름 있는 브랜드, 비싼 클럽을 선호한다. 골프 클럽에 대한 특성도 제대로 모르고 유명 브랜드만 찾는다. 그의 얘기다.
골프 클럽은 비싼 게 좋은 게 아니라, 자신한테 맞는 게 좋은 것이다. 그의 지론이다.
예컨대 퍼터는 밀어치는 사람에겐 헤드가 무거워도 되지만, 때려치는 사람은 샤프트가 짧고 가벼워야 한다. 그래야 퍼트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는 퍼터를 구입하러 오는 손님에겐 가게 안에 있는 퍼트 연습 패드에서 퍼트를 해보게 한 다음 그에 맞는 퍼터를 권유한다. 손님들은 그의 조언에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기자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몇몇 손님이 그에게 퍼터 구입 조언을 받았다.
그는 골프 클럽을 파는 걸 우선으로 하지 않는다. 고객에게 맞는 클럽이 먼저다. 이윤보다는 고객을 먼저 생각한다. 그가 오랫동안 가게를 유지하며 수많은 단골 고객을 확보한 비결이기도 하다. 골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겐 비싼 골프채보다 먼저 값싼 중고 골프채로 치다가 나중에 새 골프채로 바꿔라고 조언한다.
문 사장은 고객이 가게 들어오면 몇 마디 말만 해보고도 그의 특성을 파악한다. 성격이 급한지, 느긋한지에 따라 권하는 클럽이 달라진다. 급한 사람에겐 부드러운 클럽이 어울린다. 또 여성이지만 힘은 좋은 사람은 남자들이 치는 채가 오히려 효과적이다.
손이 큰지 작은지에 따라 클럽이 달라지거나, 그립의 굵기가 달라진다. 오랫동안 터득해온 그만의 노하우다.
서울골프상회 내부에 전시돼 있는 각종 골프클럽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숍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버텨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 등 유명 인사들도 많이 다녀갔다
문 사장은 올해로 52년째 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주변에서 강남 진출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켜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숍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버텨왔다”고 했다. 한때는 잘 되었던 소형 골프 가게가 인터넷 쇼핑몰과 대형 골프숍에 밀려 대부분 사라졌다.
그도 그 물결을 피할 수는 없다. 오롯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가게를 하면서 쌓아온 추억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신민당 당수이던 시절, 가게에 직접 들러 로스트 볼을 사갔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윤세영 SBS 회장,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정순영 전 성우그룹 회장, 염보현 전 서울시장 등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이 가게에 다녀갔다.
문 사장은 골프 가게를 운영하면서 가족을 돌봐왔다. 부인과 아들 둘, 딸 한 명이 있다. 아들 둘은 모두 출가했다. 54세에 낳은 딸은 이제 28세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지금은 독일에 있다.
“집 사람이 이젠 좀 놀다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가게 문을 닫고 나면 그렇게 해야지요. 죽으면 돈 한 푼 못가져 가잖아요.”
그의 웃음에 묘한 여운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