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미(55). 그는 건축사다.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사 자격을 땄다.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원주 한지테마파크를 비롯해 울릉도 사동항여객선터미널, 보성 국민체육센터, 하남 밀리토피아골프연습장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원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꿈이었다. 그러다 건축사로 길을 바꿨다. 일본에 있을 때 한국에서 업무차 출장 온 건축사들의 통역을 맡았는데 그때 건축사가 여유도 있고 돈도 잘 버는 직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번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성격이다. 계획을 세우면 한 길로 전진한다. 눈 뜨고 감을 때까지 움직이는 바지런한 스타일, 그게 김윤미다. 그는 요즘 골프에 푹 빠져있다. 골프에 입문한지는 20년 안팎이지만 재미를 붙인 건 2년쯤 됐다. 처음엔 너무 못쳤다. 창피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기 플레이는 한다. 그러니 골프가 새롭게 보인다. 그는 오랫동안 봉사와 기부 활동도 열심히 해왔다. 여고 때 시작한 봉사 활동이 계기가 됐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그는 늘 되새기고 있다.
김대진 기자
그는 건축사가 시간도 많고 놀러다니면서 돈도 잘 버는 것 같아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기로 했던 꿈을 접고 건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김윤미는 서울 송파구에서 인문계 여고 졸업 후 시중은행에 취업했다. 서울신탁은행, 지금은 하나은행으로 통합돼 그 이름이 사라졌다. 그곳에서 그는 5년 간 근무했다.
“아버지가 제 고 2때 쓰러지셨어요. 딸 셋인 집안에서 제가 장녀였어요. 취업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은행에 들어가게 됐죠”
그는 은행에 근무하면서도 서울 압구정동에 커피숍을 열었다. 운영은 여동생이 했다. 야간대학에도 다녔다. 그때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공부했다.
은행 입사 5년 후 그는 은행에서 받은 월급과 커피숍을 정리하고 난 자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93년 가을이었다.
“돈을 불리는 것보다는 내 자신을 불리는 것, 즉 저의 커리어를 쌓는 게 더 좋겠다고 판단했지요”
일본에서 어학연수 1년 과정을 밟았다. 그때 아르바이트로 한국에서 업무차 일본에 출장을 온 한국 건축사들의 통역을 맡았다.
“그때 그분들이 참 여유롭게 보였어요. 시간도 많고 놀러다니면서, 돈도 잘 버는 것 같고...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예 월급 단위가 달랐어요. 상상 이상으로 컸죠. 그래서 저도 건축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의 진로가 바뀌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에서 건축사로 항로가 수정된 것이다.
김윤미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지금은 역사가 100년 안팎이나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주거학(住居學)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선 인간생활학(人間生活學)을 전공했다.
한국의 대학이나 대학원 학과와는 이름부터가 다르다. 연구원 생활도 1년 했다. 건축사 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땄다. 그래서 그의 명함에는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일본건축사’라고 쓰여 있다. 그제야 기자는 그의 명함에 왜 굳이 일본건축사란 표현을 썼는지를 이해했다.
국내에서 변호사 자격을 딴 사람들은 그냥 ‘변호사 OOO’라고 하는 반면 미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딴 사람들은 꼭 ‘미국 변호사 OOO’라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일 터다. 그는 2006년 초에 귀국했다. 국내 건축사 사무소에 입사했다.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1년 안팎 지나 그 회사는 훨씬 더 큰 메이저급 회사와 합병했다. 2016년 그는 다시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건축을 좀 더 깊이 공부해 보기 위해서였다. 석사와 박사 과정 각 2년, 4년을 공부했다. 그는 건축사가 그에게 딱 맞는 직업이란 것을 깨달았다.
“건축 공부를 해보니 제 적성에 딱 맞았어요. 혼자서도 할 수 있고...그래서 심취했지요”
건축사로서 원주 한지테마파크, 울릉도 사동항여객선터미널, 보성 국민체육센터, 위례 밀레토피아골프연습장 등 여러 작품을 했다. 그러나 건축사란 돈이 아니라 보람으로 일해야 하는 직업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건축사 업무에 흠뻑 빠졌다. 공공기관 시설을 많이 설계했다. 원주 한지테마파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내에서 직원들끼리 경연을 벌였는데 제가 낸 안(案)이 채택이 됐어요. 정말 열심히 재미있게 했어요. 건축사로서 보람도 컸죠”
그는 울릉도 사동항여객선터미널, 보성 국민체육센터, 구미 복합복지센터, 위례 밀리토피아골프연습장 등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군부대 생활관 개선과 상하수도사업본부 등 여러 작품을 했어요”
그는 한때 건축사 사무소를 개소해 소장 겸 대표로도 일했다. 그러나 건축사 사무소 대표로서 하는 일이 쉽지 만은 않았다.
“돈이 안됐어요. 프로젝트 하나가 보통 8~12개월 소요됩니다. 그동안 번 돈을 쓰면서 돈이 나올 때까진 버텨야 합니다. 협력업체도 많다보니 다 쪼개 먹어야 하는 꼴이죠. 몇 억원을 받아도 남는 게 별로 없어요. 거기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진 늦게 퇴근하거나 밤을 세워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요. 여자로선 정말 힘든 일이죠. 건축주의 마음도 읽어내야 하고 체력도 뒷받침돼야 합니다. 참 고민이 많았죠”
그는 건축사란 ‘돈’이 아니라 ‘보람’으로 일해야 하는 직업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자손들이 ‘내 할머니가 이 건물을 지었다’고 자랑스러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죠”
그의 단아한 모습이 성격과 닮았다. 그는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유형이자, 사전에 계획을 세워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늘 움직여야 직성이 풀린다
김윤미는 가녀린 체격에 단아하다. 겉모습과 성격이 닮았다. “저는 MBTI가 ‘INTJ’예요”
그 스스로가 밝힌 것이다. 이 유형은 흔히 ‘여왕’ 타입이라고 한다.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의 여성은 타인의 시선보다 본인의 기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실행한다.
이 유형의 또 다른 특징은 ‘계획성’이다. 무작정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기보다는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주변에선 융통성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지혜로움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여성은 차가운 뇌섹녀, 프로 일잘러, 일 중독자로 불리기도 한다.
“저는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거나 비즈니스는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별로예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죠.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요”
그래서 그는 번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갔다. 지금 거주하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산골이다. 그것도 산꼭대기 집이다. 그가 직접 설계한 집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아침에 눈 뜨고 밤에 감을 때까지 늘 움직여야 해요. 밭일에 집안일, 운동까지 할 일이 태산이죠. 밭에는 가지와 무, 배추, 호박, 토란 등 별의별 걸 다 심었어요. 그걸 보살피는 것도 아주 바빠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아주 좋아하지요”
골프를 배우던 초기에는 골프가 너무 힘든 적도 있었다. 자신이 골프를 못 쳐 동반자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플레이를 망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위례 밀리토피아골프연습장을 건설할 때 한국토지주택공사(LH) 담당 직원이 그에게 “골프를 쳐 보신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골프연습장을 설계했으니 당연히 골프를 잘 치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였다.
김윤미는 “똑딱이는 해봤다. 필드에는 안가봤다”고 답변했다. 그때만 해도 골프연습장에서만 쳤지 코스에는 나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초반에는 골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두려웠다.
“처음엔 너무 불편했어요. 동반자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싫었어요. 그러나 제가 자연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골프장에 나가게 되면 참 기분은 좋았어요. 그래서 제 별명이 ‘달려라 하니’였어요”
한때 그는 필드에 나가기 싫어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필드에 나가지 않을까 엄청 고민했던 적도 있어요. 가기 전에 제발 비가 내려라든지 예약이 취소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제가 잘 못쳐서 플레이를 망치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건축사 일을 하면서 골프를 치는 게 나름 애로도 있었다.
“라운드를 한참 하는 데 9시만 되면 전화가 와요. 건축사(建築士)는 ‘사(士)’자 중에서도 가장 하급이예요. 남의 돈을 받아서 일하는 ‘사(士)’자다 보니 돈 많은 사람들이 부탁하는 전화를 안 받을 수가 없죠”
골프를 이론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난 뒤에는 골프가 훨씬 쉬워졌다. 그동안 갖고 있던 드라이버 울렁증도 사라졌다. 이젠 70대 타수를 꼭 쳐보고 싶다
그러다 골프에 진심으로 빠져든 계기가 있었다.
그가 90대 후반을 치든 때 부부팀이 함께 태국에 가서 나흘 간 골프를 치는 일정이 잡혔다. 출국 전 남편은 그에게 “레슨을 받고 가야 된다”고 권해 1주일 전부터 레슨을 열심히 받고 현지에 갔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쳤는데 나흘 간 드라이브가 하나도 안맞았어요. 나흘째는 창피해서 눈물이 다 나왔어요. 그때 제가 막 울었더니 남편도 많이 속상해 했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남편은 그에게 태국 골프 전지훈련을 보내줬다.
‘김형근아카데미’였다. 1주일 간 현지에서 열심히 노력했다. 마침 그를 지도했던 코치가 자신의 건국대 후배 학생인 안찬용 프로였다.
“그 학생이 골프를 이론적으로 아주 잘 가르쳐줬어요. 그러니 이해도 되고 실전에서도 훨씬 수월했죠”
그는 그 이후 1년 간 꾸준히 연습했다. 기본기가 잡혔다.
“이론이 정리되니까 비로소 골프가 잘 되기 시작했어요”
그는 골프가 하루 아침에 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끈기를 갖고 꾸준히 끝까지 가는 것, 그걸 제가 좋아하고 잘 하지요. 골프도 그런가 봅니다”
그는 이제 골프에 대한 울렁증은 극복했다.
“드라이버 울렁증이 없어졌어요. 끈기 있게 친 결과인 것 같아요. 요즘은 드라이버 거리가 160m 정도는 됩니다. 이젠 진짜 잘 쳐보고 싶어요”
그의 베스트 스코어는 86타다. 대개 보기 플레이어 정도다.
“70대 타수를 꼭 쳐보고 싶어요. 그게 꿈이예요”
그의 꿈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모든 건 그에게 달려 있다. 그의 소망대로 열심히 꾸준히 연습하면 그 꿈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건축사 일을 하면서도 별도로 돈 버는 사업도 했다. 부동산 투자와 임대업, 온라인 쇼핑몰 운영을 해 나름 성공했다. 봉사와 기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현재 ㈜메디원의 사내이사로 있다. 이 회사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건물 관리와 경영권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그동안 본업 말고도 여러 일을 해왔다.
“별도로 돈 버는 사업을 했어요. 부동산 관리와 임대업 등이죠. 온라인 쇼핑몰도 5개나 했죠. 지금은 수양딸에게 넘겨줬지만요...”
그는 여러 면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학업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택해 공부했고, 또 건축사 자격증도 땄다.
건축사로서도 여러 작품을 해냈다. 직접 사무소를 차려 운영도 해봤다. 사업에서도 나름 성공했다. 좋아하는 골프도 지금 한창 재미를 붙여 열심히 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열심히 달려온 인생이었다. 기본을 중시하는 그의 스타일대로 그는 우직하게 그 길을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이웃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여고 때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아기들을 씻기는 봉사활동을 했어요. 그게 계기가 돼 그 이후에도 여러 봉사활동과 기부를 하고 있지요”
그는 라오스에 한 달씩 아이들을 보살피는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매달 1,000만 원을 기부한 적도 있다.
“그냥 마음이 당겨서 기아대책 프로그램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어요. 나누는 일도 올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서로 화합하면서 하는 일이 중요하죠”
김윤미, 그는 그렇게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