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혼자수로 만나는 세계명화] 프란시스코 고야 〈옷을 벗은 마하〉

서양미술사 최초의 실제 여성 나체를 그린 고야의 연작

혼을 담은 손으로 수놓은 혼자수 이용주 작가가 원작과 같은 사이즈로 작업한 세계명화 작품 이야기를 전한다.

 

WRITER 이용주 작가

 

 

고야는 누구인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1746년 에스파냐 펜테토도스에서 출생해 1828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82세로 죽었다.


20세 때 마드리드의 F.바이에우 문하에서 작품을 시작해 48세가 될 때까지 로코코의 작품과 다채로운 색채기법을 배우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보시 등의 영향을 받아 이후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했다.

 

49세인 1775년부터 궁중 화가로 왕실의 인물들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성직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그렸고,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성을 상실한 잔혹한 참상을 그렸다.

 

52세인 1798년에는 궁중 수석 화가가 됐다.


고야는 인물화만을 그렸다.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 작품은 여성을 ‘잠자는 비너스’로 보는 고전적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을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해 문제가 됐다.


이후 고야의 작품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나폴레옹 군의 에스파냐 침공으로 살아난 민족의식과 중병을 앓아 청각을 잃은 체험 때문이었다.

 

왕조 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날카로운 풍자가 가득 찬 리얼리즘 작품을 그렸다. 그는 초상화·풍속화·종교화 따위를 그렸으며, 동판화에도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와 ‘에두아르 마네’에게 큰 영향을 줬다. 그의 대부분의 대표작(유화 114점, 데생 470점)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야의 대표작 〈마야〉 연작
마하 연작은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작품 〈옷을 벗은 마하〉는 지금껏 신화 속 여신들의 누드화만 그리다 진짜 여성인, 고야와 연인관계였던, 알바 공작 부인을 최초로 벗겨 1800년에 그린 그림이다.

 

현실 여성의 몸은 음란하다 여겼던 보수적인 가톨릭 사회였던 스페인 사회에서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시대의 위선을 벗겨낸 그림이 되었고, 이로 인해 후일 음란물판정까지 받았다.

 

 

최초로 실제 여성의 나체를 그리다
짙은 색의 배경에 벨벳 소재 긴 소파 위 밝은 색채로 강조된 한 여인이 전신을 앞으로 드러낸 채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침대의 명암을 정교하게 표현돼 피부에 윤기가 흐르도록 섬세한 효과를 줬다. 두 팔은 머리 뒤로 돌려 팔베개를 하고, 다리는 가지런히 모은 모습이다. 팔베개 탓에 풍만한 가슴이 들리며 무게로 인해 자연스레 벌어져 있다. 가는 허리, 육감적인 골반과 허벅지가 모이는 곳에 서양미술사 최초로 표현된 신이 아닌 인간 여성의 체모가 살짝 숨어있다.

 

 

 

작품 공개 후 작품의 주인공이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급히 같은 여자에게 옷을 입히고 〈옷을 벗은 마하〉와 똑같은 포즈로 작품 한 점을 더 그렸고 이것이 〈옷을 입은 마하(1803)〉다.

 

1808년 5월 3일 유럽을 정복하려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의 군대가 1808년 스페인을 침공했다. 당시 스페인 민중들은 수상 ‘고도이’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프랑스 군대지만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가져와 학정으로부터 민중을 자유롭게 해 줄 것을 기대하며, 나폴레옹의 군대를 환영했다.

 

그러나 스페인 민중의 기대나 소망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자기 동생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지명했고,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격렬한 민중 시위가 벌어졌다.


점령군은 이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체포한 사람들을 처형했다. 고야는 이 처형장면을 그려냈고, 그 작품이 바로 〈1808년 5월 3일〉이다.

 


스페인의 승리로 되찾은 마하
마드리드의 봉기는 스페인 전역으로 번졌다. 스페인 봉기군은 7월 바이렌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승리를 거뒀고, 이 싸움으로 프랑스군은 마드리드에서 철수했다.


이때 학정을 일삼던 과거의 수상 ‘마누엘 데 고도이’가 누드화만을 모아 놓은 방이 발각되면서 그곳에 있던 〈옷을 벗은 마하〉도 같이 압수된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는 누드화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야는 종교 재판에 회부 된다.


고야는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와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을 보고 따라 그렸던 것”이라고 해명했고, 당시 존경받는 두 거장의 작품을 보고 그렸다는 이유로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마하 시리즈 두 작품은 폐쇄된 장소에서 보관되다가 왕립 페르난도 미술학교에서 1834년 <옷 입은 마하>가 먼저 공개됐다. 그리고 1901년이 되어서야 두 작품 모두가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함께 전시됐다.

 

관련기사

11건의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