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는 인류 최초의 주식 중 하나였다. 도토리는 다람쥐가 아니라 돼지가 좋아한다. 도토리라는 이름도 돼지의 고어인 ‘돝’에서 유래됐다. 가을을 맞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에 곁들이기 제격인 도토리묵과 도토리 이야기를 소개한다.
WRITER 양향자
영양 만점, 도토리묵 무침
재료
도토리묵 500g, 쪽파 4줄기, 참깨, 간장 4큰술, 고춧가루 2큰술, 매실액 1큰술, 다진마늘 1/2큰술, 들기름 1큰술
만드는 법
❶ 도토리묵은 칼로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준다.
❷ 쪽파는 송송 썰어준다.
❸ 그릇에 송송 썬 쪽파와 간장, 참깨, 고춧가루, 매실액, 다진 마늘, 들기름을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준다.
❹ 양념장에 묵을 넣고 살살 버무려 그릇에 담는다.
도토리 좋아하는 건 다람쥐가 아닌 돼지?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로는 다람쥐가 유명하지만 정작 다람쥐는 도토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도토리가 야생 다람쥐의 주식인 건 맞지만 그냥 지천에 깔린 게 도토리라서 가장 많이 먹을 뿐이다.
반려 다람쥐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바라기씨나 아몬드, 잣 등의 맛좋은 견과류를 자주 먹고, 밀웜이나 귀뚜라미, 메뚜기 따위의 곤충도 즐겨 먹는 다람쥐는 사실 도토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뜬금없게도 정작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은 다름 아닌 돼지다. 도토리라는 단어의 어원도 돼지의 옛말인 ‘돝’에서 따온 단어다.
실제 15세기에 쓰인 ‘두시언해’에는 도토리를 ‘도토밤’ 혹은 ‘도톨밤’으로 적었고 더 이전에 쓰인 ‘향약집성방’에서는 도토리를 ‘저의율’ 즉 ‘돼지의 밤’이라고 기록했다.도토리는 ‘도틜밤’ 즉 ‘돼지가 먹는 밤’이란 뜻으로 나온 단어인데, 이것이 ‘도토밤’으로 바뀌고 ‘도톨밤’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돼지’와 ‘돝’이라는 단어 사이의 유연성이 사라지고, ‘도톨’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어 ‘도톨이’, 지금의 ‘도토리’라는 단어가 돼 ‘도톨밤’에 대치된 현대 한국어로 남았다.
도토리 먹인 돼지, 하몬 이베리코 데 베요타
중세부터 유럽의 농부들은 도토리를 많이 따서 돼지들에게 먹이고 그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해서 겨울에 먹을 양식으로 썼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유럽과 미국에서는 가축의 사료용으로 도토리를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스페인 특산품으로 유명한 햄인 하몬 중에서 최고 등급인 ‘하몬 이베리코 데 베요타’는 도토리만 먹여서 키운 건강한 돼지의 뒷다리로 만든다.
야생동물들도 도토리가 주식인 경우가 많다. 곰의 주식 중에도 도토리가 있다. 또한 의외로 호랑이도 먹이를 먹고 난 후 소화를 위해 도토리 몇 알을 먹는다고 한다. 어치나 원앙 같은 새들도 도토리를 좋아한다.
특히 어치나 산갈까마귀는 겨울에 먹으려고 도토리를 숨겨놓는데 기억력이 하도 좋아서 숨긴 위치를 다 기억해서 빼먹기 때문에 도토리나무 확산에 크게 기여하진 않는다. 다만 여유분으로 숨겨놓은 도토리가 이듬해 발아하는 경우는 많다.
도토리의 효능
도토리의 칼로리는 100g당 22㎉로 식이 섬유가 풍부하며 타닌 성분이 체지방 흡수와 억제 분해에도 도움을 줘 체중 관리에 도움이 된다.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칼륨, 아미노산, 타닌 폴리페놀 성분 등 우리 몸의 건강에 돕는 성분이 다양하게 들어있다.
특히 타닌 성분은 노화 방지를 일으키는 활성산소를 제거하며, 손상된 세포를 재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중금속을 배출하는 효능도 있다. 황사, 미세먼지 등 기타 원인으로 우리 몸속에 쌓여 있는 중금속이나 여러 유해 물질을 흡수해 배출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되는 아콘산 성분이 들어있고, 해독작용뿐 아니라 알코올을 분해해 주어 숙취 해소에 탁월하다.
성질이 따뜻해서 평소 손발이 차거나 몸이 차가운 사람, 여성 질환이 있는 여성들이 도토리를 꾸준히 먹기만 해도 매우 효과적이다.
작물화 실패 까닭
우리는 왜 이 소중한 식량 공급원을 작물화하지 못했을까? 고대 농경민들은 접목법처럼 까다로운 기술도 훌륭히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식물들은 왜 작물화에 실패했을까. 알고 보면 도토리가 열리는 떡갈나무는 처음부터 삼진을 먹고 시작한 것과 같다.
첫째. 떡갈나무의 느린 성장 속도는 농경민들의 인내력을 소모 시키기에 충분했다. 밀을 뿌리면 몇 달 만에 수확할 수 있고, 아몬드를 심으면 3. 4년 만에 열매가 열리는데 도토리를 심어서 소출이 나오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린다.
둘째, 떡갈나무는 원래 다람쥐에게나 맞는 크기와 맛의 열매를 만들어내도록 진화됐다. 그 녀석들이 바비 도토리를 파묻고 파내고 까먹는 모습은 누구나 모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가 깜빡 잊고 파내지 않으면 그 도토리에서 떡갈나무가 자라난다.
따라서 떡갈나무가 자라기 적합한 곳이라면 거의 빠짐없이 해마다 수십억 마리의 다람쥐들이 각자 수백 개의 도토리를 퍼뜨리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 인간은 도저히 원하는 도토리를 얻기 위해 떡갈나무를 선택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성장 속도는 느리고 다람쥐는 재빠르다는 문제점은 너도밤나무와 히코리 나무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각자 유럽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야생 상태로 많은 견과류를 얻고 있지만 역시 작물화되지는 못했다.
인류 최초의 주식 중 하나였던 도토리
도토리는 인간 최초의 주식 중 하나였다. 신석기 시대 때 농사가 시작됐지만, 아직 식량을 자급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던 탓에 도토리가 주식으로 이용됐다. 하지만 쓴맛과 떫은맛이 나는 타닌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먹을 수는 없었다.
토기에 도토리와 물을 채워 넣어 타닌 성분을 제거하고 가루로 만들어 딱딱한 빵을 만들어 먹곤 했다. 도토리가루를 물에 개어 반죽한 덩어리를 토기 안에 붙여 불로 굽는 식이었다. 한국 강원도 산간지방에도 이와 비슷한 요리가 남아있다.
유물로는 한국에서는 서울 강동구의 암사동 선사 유적지에서 탄화된 도토리가 발견됐고, 창녕군의 신석기 시대 비봉리 유적에서는 도토리 저장고가 발견됐다.
일본 조몬 시대 유적지에서도 도토리를 물에 담가 떫은맛과 벌레 등을 빼낸 뒤 과자로 만들어 먹은 유적이 다수 발견되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도토리는 주식의 하나로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가 끊긴 도토리 식문화
남한에서는 보통 도토리묵으로 만들어 먹고 북한에서는 도토리로 술과 된장과 떡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남북한을 제외하면 도토리로 뭔가 요리를 만들어 먹는 나라는 의외로 찾기 힘들다.
북한이야 워낙 먹을 게 없으니 그렇다 치고 다른 게 많은데도 굳이 도토리를 먹는 나라는 남한이 거의 유일할 정도다. 역사적으로야 어느 때건 먹을 게 부족한 시절이 많았으니 도토리를 어떻게든 요리해 먹은 기록이 있긴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대가 끊겼다.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도 페르세우스가 고르곤 자매를 찾을 때 도토리를 먹는 사람들을 찾으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서양에서는 북미 원주민들이 먹거나, 또는 거기에서 파생된 도토리 웰빙 식품이 전부라고 봐도 된다.
과거에는 도토리로 대용 커피를 만들기도 했으나 도토리 대용 커피가 유행하던 시기는 물자가 전반적으로 부족했던 세계 대전 시기였고, 이마저도 종전 뒤 사라졌다.
일본에선 조몬 시대부터 도토리 요리가 있다고는 하나 현재는 맥이 끊기다시피 하고 거의 먹지 않으며 별걸 다 먹는다는 중국에도(한때 반짝 건강식으로 주목받긴 했지만) 도토리 요리는 거의 없다. 숙취 해소나 중금속 배출 등 신체의 각종 독소를 해독 또는 배출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 떠돌지만, 관련 연구도 사실상 전무하다.
대신 칼로리는 낮고 탄수화물과 수분 함량이 많아 다이어트 식품 또는 대체 식품 등으로는 자주 쓰인다. 하지만 떫은맛을 내는 타닌 때문에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불량과 변비의 위험
이 있으므로 150g 이하만 먹어야 한다. 다른 견과류처럼 구운 것을 넛 크래커로서 먹으면 호두와 아몬드의 중간 정도 맛이 나 간식거리로도 의외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