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이코노미 김정훈 기자 | 전국 군 단위 지자체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최근 그 답은 ‘해남’일 것이다.
땅끝에서 시작된 이 변화는 통상적인 지역개발의 틀을 넘어서 있다. 농어촌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전통과, AI와 에너지 산업이 상징하는 첨단이 한 지역에서 교차하는 실험. 해남군이 스스로를 ‘대한민국 농어촌수도’로 선포하며 내건 이 대담한 비전은, 그동안 축적된 성과와 조용한 전환의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해남군은 2일, 민선 8기 3주년을 맞아 군청 대회의실에서 언론인 간담회를 열고 ‘농어촌수도 해남’이라는 새로운 비전과 함께 그간의 주요 군정성과를 공유했다. 명현관 군수는 이 자리에서 “민선 7~8기는 역대 최대의 성과를 만들어낸 시기였다”며 “이제는 이 성과를 결집해 해남을 농어촌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더 큰 그림을 실현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해남군의 변화는 숫자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해남은 전국 군 단위 지자체 최초로 예산 1조 원 시대를 열었다. 행정적 성과 그 자체를 넘어, 해남이 국가와 전남도의 투자 신뢰를 받는 지자체로 도약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도비 확보 실적 역시 괄목할 만하다. 2024년 기준 3,594억 원으로, 민선7기 이전인 2017년(1,852억 원) 대비 두 배 가까운 증가를 기록했다. 공모사업 수주 성과도 두드러진다. 2018년 49건, 498억 원이던 규모는 2023년 기준 103건, 1,510억 원으로 세 배 이상 성장했다. 그만큼 해남은 국가와 도의 각종 정책 자금을 실질적 사업으로 끌어오는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예산과 공모 성과는 곧 지역 현안 해결로 이어졌다. SOC 확충, 복지 확대, 농어업 기반 시설 개선 등 각종 체감도 높은 사업들이 연이어 추진됐다. '일하는 군정', '돈 버는 군정'이라는 해남군의 구호는 이제 결과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해남이 진짜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농어업 기반 위의 첨단산업 융합’이라는 전례 없는 구상이다.
올해 2월, 해남군은 전라남도와 함께 미국을 방문해 글로벌 투자사들과 손잡고 세계 최대 규모의 AI 슈퍼클러스터 유치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총 15조 원이 투입될 이 사업은 2030년까지 AI 컴퓨팅 인프라, 데이터센터, 3GW 규모의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을 갖춘 초대형 클러스터를 해남에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미국 북버지니아(2.5GW), 중국 베이징(1.8GW)을 뛰어넘는 규모로,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 이 구상은 현 정부의 시군 공약에도 반영되어 추진의 현실성을 한층 더하고 있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해남은 첨단 산업의 중심지로 재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해남은 그저 ‘AI 허브’에 머무르지 않는다. AI 산업과 농수산업의 접목, 즉 디지털농업, 스마트양식, 기후변화 대응형 농업기술 개발 등을 통해 첨단산업과 1차 산업의 실질적 융합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이는 해남이 단순한 투자유치지를 넘어선, 산업 융합의 실증지이자 미래형 농어촌 모델로 주목받는 이유다.
해남군은 누구보다 농어업을 소중히 여겨온 지역이다. 2019년 전국 최초로 농민수당을 도입하며 농어업의 공익적 가치를 제도화했고, 군 직영 온라인쇼핑몰 ‘해남미소’는 전국 최대 규모의 공공 판매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이와 함께, 지역 소농 500여 농가가 참여하는 로컬푸드 직매장과, 6년 만에 누적 7,600억 원 매출을 달성한 ‘해남사랑상품권’도 지역경제 순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오는 2027년 개소 예정인 국립농식품기후변화대응센터는 해남의 위상을 더욱 높일 전망이다. 전국 최대 규모의 농업연구단지가 조성되고 있으며, 이곳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업 분야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러한 정책과 시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해남은 ‘지키는 농업’에서 ‘바꾸는 농업’으로의 전환을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다.
인프라도 달라졌다. 해남군은 지난해 기회발전특구와 교육발전특구에 모두 선정되며, 산업과 인재 양성의 기반을 동시에 확보했다. 솔라시도 기업도시의 데이터센터, 화원산단의 해상풍력 배후단지 등 26만 평의 산업부지는 이미 첨단기업 유치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사람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 해남은 이 원칙에 따라, 청년이 돌아오고 정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정책과 제도를 입체적으로 설계하고 있다.
교통망 역시 전환점을 맞고 있다. 보성임성리해남 철도 개통으로 ‘땅끝해남역’이 문을 열었고, 광주완도 고속도로 2단계(강진해남 구간), 국도 77호선 해남~압해 간 연결공사, 지방도 확장 사업 등이 본격화되며, 땅끝이라는 지리적 제약도 해소될 전망이다.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도전하자.” 명현관 군수가 수차례 강조한 말이다. 그 도전은 농어업이라는 근간을 지키면서도, AI와 에너지라는 전혀 다른 산업을 품으려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해남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은 흔히 말하는 지역 발전과는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농어촌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다.
명 군수는 이날 간담회에서 “기후변화와 디지털 대전환, 청년 인구 감소 등 농어촌이 직면한 과제는 막중하다. 하지만 해남은 농어업과 첨단산업, 농어촌 인프라라는 세 축을 기반으로, 전국 농어촌의 표준 모델이 되겠다”고 밝혔다.
이제 해남은 더 이상 ‘땅끝’이 아니다. 중심으로 나아가는 길목, 전통과 첨단이 교차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혁신의 현장이다. 이곳은 곧 변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이 모이는 새로운 길목에서 해남의 미래가 구체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