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션 시장이 숨을 고르는 동안, 백화점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우리는 여전히 물건을 파는 공간인가, 아니면 경험을 설계하는 플랫폼인가.”
고물가, 소비 위축, 재고 과잉, 친환경 규제. 이 네 단어는 이제 패션 산업의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 현실이 됐다. 빠르게 만들고, 많이 깔고, 싸게 파는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매장은 여전히 시즌과 물량 중심의 진열을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시장이 아니라, 사고방식일지 모른다.
◇ K-뷰티는 앞서갔고, K-패션은 아직 길을 찾고 있다
K-뷰티는 이미 답을 알고 움직였다. 단순한 화장품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스토리, 팬덤을 함께 수출했다. 그 결과 K-뷰티는 2020년대 내내 안정적인 성장 곡선을 그리며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반면 K-패션은 여전히 ‘상품’의 언어에 머물러 있다. 디자인은 좋아졌고 품질도 경쟁력을 갖췄지만, 세계관과 서사는 아직 희미하다. K-팝이 음악을 넘어 문화가 됐듯, 패션 역시 옷을 넘어 ‘속하고 싶은 세계’가 되어야 하는데,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산업은 같은 고객을 바라본다. 같은 Z세대, 같은 K-컬처 팬덤, 같은 SNS와 OTT 채널. 마케팅 방식도 거의 같다. 그럼에도 유통 현장에서는 여전히 뷰티와 패션을 다른 층, 다른 MD, 다른 KPI로 쪼개 관리한다. 이 분절이야말로 성장의 병목이다.
◇ 온라인이 커질수록, 오프라인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온라인이 강해질수록 오프라인은 두 갈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가격 경쟁의 종착지로 내려가거나, 경험 경쟁의 출발점이 되거나.
글로벌 리테일 기업들이 RMN(Retail Media Network)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장을 광고판으로 바꾸고, 데이터를 수익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광고 화면이 늘어날수록 질문은 더 날카로워진다. “이 광고는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콘텐츠와 상품, 데이터가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 RMN은 결국 또 하나의 디지털 전단지에 불과하다.
◇ ‘K-디지털 체험관’이라는 다른 상상
그래서 최근 유통 업계에서 조심스럽게 거론되는 개념이 있다. 캐릭터 IP, 디지털 트윈, AI 기반 O4O 운영체계를 결합한 ‘K-디지털 체험관’이다.
이 공간에서 고객은 ‘쇼핑객’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캐릭터는 직원이자 도슨트가 되고, 상품은 진열물이 아니라 스토리의 일부가 된다. 디지털 트윈은 화면 속 아이템과 실제 상품을 연결하고, AI는 취향을 기록하며 다음 경험을 설계한다.
백화점에 왔다기보다, 하나의 K-뷰티·K-패션 세계관 안으로 들어온 느낌. 이것이 체험관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 사라프렌즈가 보여주는 가능성
국내 한 K-뷰티 기업이 준비 중인 ‘사라프렌즈(Sarah Friends)’ 프로젝트는 이 구조를 구체화한 사례다. 캐릭터 IP를 중심으로 뷰티와 패션, 굿즈, 게임, OTT 콘텐츠가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움직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패션의 역할이다. 패션은 더 이상 굿즈가 아니라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완성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캐릭터의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이 곧 룩이 되고, 룩은 자연스럽게 구매로 이어진다. 디지털 패션쇼 장면은 다시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는 RMN과 글로벌 온라인으로 확장된다.
이 구조에서 패션과 뷰티는 나뉘지 않는다. ‘하나의 룩’, ‘하나의 세계’로 팔린다.
◇ 숫자가 말해주는 것
패션과 뷰티를 분리해 파는 구조와,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파는 구조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내부 분석에 따르면 후자의 경우 총매출은 약 27%, 매출총이익은 최대 30%까지 높게 나타난다.
이 차이는 대단한 기술이 아니라, 장바구니의 구조에서 나온다. 고객이 “무엇을 더 살까”가 아니라 “이 세계를 완성할까”를 고민하는 순간, 소비의 폭은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2026년을 향한 K-리테일의 경쟁은 더 큰 매장, 더 화려한 외관이 아닐 것이다. 세계관을 설계할 수 있는가, 데이터를 순환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팬덤을 품을 수 있는가의 싸움이다.
백화점의 RMN은 단순 광고판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이야기 속 무대가 될 것인가.
K-뷰티는 여전히 ‘카테고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K-패션과 K-라이프스타일을 여는 출구가 될 것인가.
한국에는 이미 캐릭터 IP와 디지털 트윈, O4O 구조를 갖춘 설계안이 존재한다. 남은 것은 선택이다. 누가 먼저 ‘1호 파트너’가 되어 새로운 K-리테일의 얼굴을 만들 것인가.
백화점이 물건을 파는 공간이라는 오래된 정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다음 무대는 열린다.
심설화 베라카코스메틱스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