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더 이상 전장은 총과 미사일이 오가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에너지와 원자재, 생산능력과 공급망이 맞붙는 또 하나의 전장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전장은 이미 한국 경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경제 전시상황’을 언급한 배경도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는 위기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경제 운영의 기준이 평시에서 비상 체제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에 가깝다. 특히 “한 방울의 석유라도 더 확보하라”는 주문은 지금의 위기가 시장 메커니즘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분명히 한 표현이다.
최근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해 2400만 배럴 규모의 원유 도입을 확보한 사례는 이 변화의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외교 성과가 아니라, 글로벌 공급 불안 속에서 한국을 우선 공급 대상으로 묶어낸 ‘선점’의 결과다. 더 나아가 추가 물량까지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에너지 확보가 가격 협상이 아니라 국가 간 신뢰와 전략의 영역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 발언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지금의 위기는 경기 사이클의 문제가 아니라 공급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구조적 위험이다. 이 단계에서 정부는 시장을 보완하는 역할에 머물 수 없다.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공급선을 유지하는 데 국가 역량을 전면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국면이다.
다만 확보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진짜 경쟁은 그 이후에 시작된다. 일정 물량을 들여왔다고 해서 위기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공급은 다시 불안정해지고, 확보한 자원은 빠르게 줄어든다. 결국 핵심은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을 이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신속하게 추가 확보를 이어갈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번 사태는 비용 구조의 변화도 함께 드러냈다. 낮은 비용의 공격 수단이 반복적으로 투입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더 큰 비용이 들어가는 방식이 고착화되고 있다. 이 구조는 경제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산업 전반의 비용을 끌어올리고, 이를 완충하기 위한 정책은 재정 부담으로 이어진다. 기업은 수익성을 압박받고, 국가는 재정 지출을 확대할 수밖에 없는 이중 구조가 형성된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험 역시 여기에 있다. 에너지와 원자재는 필요할 때 즉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다.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생산 자체가 멈출 수 있다. 제조업 비중이 높은 경제 구조에서는 이는 곧 산업 기반의 흔들림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방향의 전환이다. 자원 확보와 공급망 안정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 전략으로 구체화돼야 한다. 우선 에너지 비축 수준을 재점검하고, 단기 비축을 넘어 중장기 저장 능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주요 산유국과의 장기 계약을 확대해 가격 변동과 공급 불안을 함께 관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핵심 원자재에 대해서도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선을 다변화하는 한편, 전략 소재에 대해서는 국내 생산 기반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는 과제지만,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
물류와 운송 역시 중요한 축이다. 해상 운송 리스크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주요 항로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고, 국가 차원의 물류 대응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민간 기업과의 협력 구조를 통해 공급망 전반의 대응 속도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분명히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국가 주도의 자원 확보가 불가피한 국면이지만, 모든 영역을 정부가 떠안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과도한 개입은 비효율과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고, 민간의 역할을 위축시킬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 전략 자산 확보와 리스크 관리에 집중하고, 실행과 운영에서는 민간과의 역할 분담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균형이 무너지면 또 다른 비용이 발생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추가경정예산은 이러한 충격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재정은 시간을 확보하는 역할을 할 뿐, 자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지금의 위기는 수요가 아니라 공급과 확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원유 확보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앞으로의 경쟁은 가격이 아니라 안정성과 지속성에서 결정된다. 얼마나 확보했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위기가 아니라 구조의 변화다. 시장 중심의 효율 경쟁에서 벗어나, 확보와 유지,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핵심이 되는 경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를 읽지 못하면 대응은 항상 뒤따를 수밖에 없다.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총성이 아니라 자원과 공급망, 그리고 국가의 버틸 힘을 겨루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문채형 뉴스룸 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