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동두천 20.6℃
  • 맑음강릉 19.5℃
  • 맑음서울 20.8℃
  • 맑음대전 20.6℃
  • 맑음대구 21.3℃
  • 맑음울산 16.7℃
  • 맑음광주 20.9℃
  • 맑음부산 15.7℃
  • 맑음고창 19.5℃
  • 맑음제주 16.4℃
  • 맑음강화 17.4℃
  • 맑음보은 19.3℃
  • 맑음금산 20.5℃
  • 구름조금강진군 20.0℃
  • 맑음경주시 22.2℃
  • 맑음거제 16.5℃
기상청 제공

세월호 참사 11주년을 보내며, 전국에서 추모 행사가 열려

‘탑승자들을 두고, 탈출한 세월호 선장 이준석과 배를 끝까지 지키며, 최후 맞았던 서해 훼리호 백 선장과 무엇이 다른가?’를 새월호 참사 11주년을 맞아 밝힌다’ 여기서 본훼퍼의 말을 기억해 하자.

지이코노미 이성용 기자 | 세월호 참사 11주년을 맞이하여, 전국 각지에서 추모 행사를 맞이하는 이때.  “정신 나간 사람이 운전하는 버스. 배를 탄 사람은 다 죽는다” 란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가 남긴 말을 기억해 본다. 

 

‘선장은 배에 탄 이들을 도착지점까지 인도할 책임 있다.’ 고 본 기자는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11주기 추모를 하고 있는 이때, 이 참사가 일어 날때 세월호 사무직원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를 다시 한번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 11주년을 맞으며, 세월호 참사로, 바닷물 속에 잠겼던 세월호를 3년 후, 견인해 올리면서, 당시 세월호 침몰과 함께 가족을 죽음을 아파했던 유가족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 11주기 추모 행사가 전국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선장 자질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11년 전, 승객을 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도망한 세월호 선장 이준석과 배를 지키면서, 승객을 지켰던, 서해 훼리호 백 선장이 과연 무엇이 다른가를 분석해 선장의 정신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해 보며,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32년 전, 애타게 "승객들을 구하려고 끝까지 배속에 남아 사투를 벌였던 서해 훼리호 백 선장의 숭고한 죽음이 떠오른다. 전북 부안군 위도면 주민들과 그날의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32년 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당시 배 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백운두(당시 56세)선장을 우린 '진정한 뱃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20분쯤 부안군 위도면을 떠나 포항으로 가던 중 침몰, 362명의 승객 중 292명이 숨진 사상 최악의 해상 참사였다.

 

결국 선원들을 다 구하려다 백 선장은 사고 5일 만에 침몰 선박 2층 조타실 뒤편 통신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고 순간 선장실에 있었던 백 선장은 배에 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선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생명을 배에 맡기고, 급히 조타실 뒤 통신실로 뛰어들었고, 순식간에 휩쓸려 들어온 물살에 출입문이 막혀 탈출하지 못하고 희생 되었다.

 

결국 해양경찰에 구조요청을 하려고 통신실로 뛰어들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위급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승객의 안전을 지키고자 훼리호 백 선장은 숭고한 죽음을 택했다.

 

그 당시 서해 훼리호는, 출항 당시 북서풍이 초당 10∼14m, 파고 2∼3m로 해상 기상이 좋지 않았었다. 폭풍주의보는 3m∼4m 라, 기상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이날 백 선장은 결국 높은 파도 때문에 운항이 어렵게 되자 무리한 운항보다는 회항을 결정, 선수를 돌리려다 사고와 맞닥뜨렸다. 그 당시 극도의 불안 속에서 무서운 죽음을 직감했을 그였지만, 배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선장으로서 자세와 의무,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BUT,‘ 11년 전, 세월호(이준석 선장)침몰로’배 침몰하면 선장이 먼저 뛰 내리는 나라’란, 말을 듣게 되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선장이고, 누가 승무원이고, 사무원이었단 말인가.’

 

이때 세월호 침몰과 함께 입수한 탑승자 전체 명단과 생존자 명단을 비교한 결과 세월호 선장 이준석(69)을 비롯해 선박직 15명은 전원 생존하였고, 선장 이씨 외에 선박직 생존자는 1·2·3등 항해사 4명, 조타수 3명, 기관장·기관사 3명, 조기장·조기수 4명이었고 학생들은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선내 방송 때문에 배 밖으로 대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이. 선장 이준석(69)을 비롯해 선박직 15명 전원은 평소 익숙한 통로를 이용해 전원 탈출했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11주기를 맞이하며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특히, 그 당시 선장 이준석은 첫 구조선에 몸을 싣고, 육지에 도착함으로써, 승객이 모두 대피할 때까지 배를 지켜야 하는 선장의 의무를 완전히 저 버렸던 것이다. 선사의 위기대응 매뉴얼대로라면, 선장은 선내에서 총지휘를 맡고, 1항사는 현장지휘, 2항사는 응급처치와 구명정 작동, 3항사는 선장을 보좌해 기록·통신 업무를 담당해야 했지만, 모두 이 매뉴얼을 무시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학생들의 탈출을 돕다가 유명을 달리했거나 실종된 승무원은 주로 승객 서비스를 총괄하는 사무장·사무원들이었다.

 

 지금부터 약 11년(2014년 4월 16일 침몰)이후, 우리나라가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배 침몰하면 선장이 먼저 뛰내리는 나라. 대한민국 이란 말을 듣게 되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본 기자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누가 선장이고, 누가 선원인가 묻고 싶다.’ 그리고 11주기 추모 모임을 보내며, 정치적인 공세 보다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토록 후속조치를 해 놓고, 먼저 세월호 유가족들과 11년 전, 사고로 다친 이들. 모두에게 위로와 새 힘을 얻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