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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 시선] 트럼프의 알래스카 담판, 평화가 아닌 정치 무대

화려한 수사와 군사 퍼포먼스 뒤에 남은 건 ‘사진’뿐
휴전 중재자는 거부, 정치 무대의 연출가로 자임한 트럼프
나토의 불안·우크라이나의 반발·유럽 내부의 균열 노출
푸틴은 외교 상징 챙기고,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알래스카 회담을 두고 “매우 생산적이었다”, “10점짜리 회담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그러나 화려한 수사와 달리, 실질적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알래스카에서의 만남은 휴전을 향한 이정표가 아니라, 트럼프가 치밀하게 설계한 정치적 무대에 가까웠다.

 

 

트럼프의 발언은 의도적으로 모호했다. “합의가 될 때까지는 합의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곧 이번 회담에서 휴전 합의가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푸틴이 언급한 ‘이해(understanding)’라는 표현 역시 구속력 없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양측 모두 결과를 내놓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트럼프는 “성공적”이라는 포장으로, 푸틴은 “대화의 지속”이라는 명분으로 각각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

 

트럼프가 이런 전략을 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휴전 중재자의 무거운 짐을 떠안을 의지가 없었다. 전쟁 종식을 위한 합의는 본질적으로 복잡하다. 우크라이나, 나토,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누구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고, 그 결과는 곧 트럼프 본인의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책임 있는 중재자가 아니라, 모호한 언어를 활용해 ‘기회의 정치인’으로 남는 길을 선택했다.

 

푸틴이 제안한 모스크바 회담을 두고 트럼프가 “흥미롭다”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전쟁 종식을 위한 로드맵이 아니라, 외교 이벤트의 ‘다음 회차’를 예고하는 행위다. 트럼프는 전쟁을 끝내는 협상자가 되기보다, 협상 테이블을 계속 열어두는 연출가가 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회담의 무대 설정도 정치적 색채가 짙다. 알래스카 군사기지라는 장소는 푸틴의 미국 방문을 극적으로 연출하기에 적합했다. 회담 직전 B-2 스텔스 폭격기와 F-35 전투기를 전개한 것 역시 힘의 과시였다. 그러나 그 장엄한 퍼포먼스는 실질적 합의가 전무한 현실을 덮기 위한 장식일 뿐이었다. 회담이 끝난 뒤 남은 것은 ‘사진’과 ‘연설’, 그리고 트럼프의 자기 홍보뿐이었다.

 

푸틴은 이 자리에서 외교적 상징을 챙겼다.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 본토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 자체가 국내 정치에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고, 서방 제재에 맞서는 외교적 카드로도 활용 가능하다. 반면 트럼프가 얻은 것은 미국 외교의 진전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브랜드 강화였다. “내가 아니면 이런 대화를 열 수 없다”는 메시지는 트럼프 지지층을 향한 강력한 신호였다.

 

문제는 회담의 여파가 국제무대에 미친 영향이다. 나토는 즉각적인 경계심을 드러냈다. 구체적 합의 없이 미·러 두 정상이 만나 대화만 나누는 형식은 동맹국들에 불안을 안겼다. 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의 반응은 더욱 노골적이다. 자신들의 운명이 당사자 없는 담판 속에서 거래되는 듯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이는 정치적 배신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 내 시각은 엇갈린다. 전쟁 장기화로 피로감을 느끼는 일부 국가들은 이번 만남을 ‘휴전을 향한 신호’로 해석하려 하지만, 실질적 합의 없는 이벤트 외교가 반복되면 오히려 서방의 결속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독일과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미·러 담판이 또 다른 양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심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알래스카 회담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새로운 균열을 낳았다. 트럼프는 국내 정치적 이미지를 챙겼지만, 나토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우크라이나의 불안을 자극했으며, 유럽 내부의 이견을 노출시켰다. 푸틴은 외교적 승리를 챙겼지만, 전쟁의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알래스카에서 드러난 진실은 명확하다. 트럼프는 평화의 중재자가 아니라 정치의 연출가였다. 이번 회담은 전쟁을 멈추는 장면이 아니라, 트럼프가 자신의 정치적 무대를 또 한 번 화려하게 꾸민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 무대의 조명이 꺼진 뒤에도,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다.

 

문채형 뉴스룸 국장